팥빵과 오래된 교복

by 이십삼

"팥빵 먹을래?"


그것이 나와 은희의 첫 만남이었다. 다 해진 교복을 입은 그녀는 노란 머리핀을 하고 있었으며, 목깃은 여러 번 꿰맨 흔적이 보였다. 옷매무새는 단정했지만, 시간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팥앙금이 가득 찬 팥빵을 품에 안은 그녀의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순간, 그녀는 작은 손을 내밀며 내게 직접 팥빵을 쥐여주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왠지 모르게 그 팥빵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충일여고 3학년 김은희야. 너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희, 그 웃음에는 어떤 해사함이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팥빵을 받아 들었다. 그 이후로 은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매일 문구점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다 해진 교복 차림으로, 늘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경아야, 이따 비 온다는데 우산 챙겼어?", 다음 날은 "오늘 도시락은 뭐 가져왔어?" 라며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었다. 나는 그녀를 피해 다른 길로 빙 돌아갔다.


나는 외톨이, 흔히 말하는 왕따였다. 친구들의 눈길은 언제나 나를 비켜갔다. 골목 어귀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 시선을 거두거나, 마치 지독한 냄새라도 나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익숙한 일상이었다. 다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나는 그 사실에 지독하게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나는 늘 혼자였다. 그런 내가 불편할 때마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은희가 낯설었고, 그 낯섦음이 때로는 당황스러움으로, 때로는 짜증마저 일게 했다. 다가오는 모든 온기는 결국 등을 돌릴 뿐이라는 지겨운 경험 앞에서, 나는 은희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문구점 앞 골목을 지나던 길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비웃고 있었다. "이제야 오네. 여드름 괴물." "안경 좀 봐, 자물쇠 걸어버리고 싶네." 그들은 나의 책가방을 엎고, 내가 쓰던 안경을 빼앗아 던졌다. 익숙한 폭력 앞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들의 악의 가득한 웃음소리가 귓볼을 가득 채웠다.

그때였다. 익숙한, 그러나 오늘은 한층 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네 뭔데 내 친구 괴롭히는 거야? 당장 안 꺼져?" 은희였다. 그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들 앞에 섰다. 다 해진 교복 차림의 은희를 본 아이들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경멸이 스쳤다.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수군거렸다. "뭐야, 저 사람은? 옷 입은 것 좀 봐. 미친 것 같아. 그냥 가자." 그들은 은희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도망쳤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나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은희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색하지만 따뜻한 손길이었다. 묘하게 오래된 옷에서 풍기는 냄새, 쿰쿰하고 약간은 눅눅한 흙내음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부터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함께 고무줄 놀이를 했다. 은희는 익숙한 동작으로 고무줄을 휘감았고, 나는 어설프게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깔깔대며 내 어설픈 몸짓을 비웃다가도 이내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과거 나의 발걸음은 항상 무겁고 어둔 곳만 맴돌았다. 그런 내게, 그녀는 밝고, 가벼운 리듬을 선물했다. 은희와 함께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는 은희의 낡은 앨범을 펼쳐 보기도 했다. 바래고 희미해진 흑백사진 속에서 입학식을 축하하며 환하게 웃는 은희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다만 사진 속의 교복은 빛바래지 않았다는 것이 달랐다. "이게 내가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이야. 참 어렸다 어렸어." 그녀는 그때가 마치 오래된 과거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가끔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나의 상처를 꺼내 보였을 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은희의 맑은 눈망울 속에는 내가 있었다. 그 눈망울 속에서 내가 울면 그녀도 따라 울었고, 내가 웃으면 그녀도 같이 웃었다. 그런 은희의 존재는 해져버린 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꿰매주는 실과 바늘 같았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내 세계는 은희의 온기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렸고, 빛바랜 나의 표정에는 다시 희망의 색채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은 팥빵처럼 따뜻했고, 참 달았다.

한번은 은희가 내 손을 꽉 잡았다. 하이얀 피부 위로 푸른 힘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작은 만년필을 꺼내 내 손바닥에 꾹꾹 눌러 글씨를 써 내려갔다. ‘친구’. 번지지 말라며 조심스럽게 입김까지 불어주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고, 고마웠다. 그 두 글자는 세상의 어떤 낙서보다 진했고, 어떤 위로보다 따뜻했다. 나는 그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변화와 더불어 은희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승달처럼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점점 활기가 돋았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자라나는 두 그루의 나무 같았다. 은희는 나의 빛이 되어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삶의 활력을 선물했다. 어느 날, 은희는 내게 말했다. “경아야, 우리 이제 곧 졸업하잖아. 나는 졸업하기가 참 싫다." 나는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막연한 불길함 같은 것이었다. 마치 닿을 수 없는 저편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말은 고요하게 나에게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자 낯선 그림자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있었다. 나는 엄마와 대화하던 낯선 여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은희는 다 해진 교복을 입은 채 거실 바닥에 엎드려, 마치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낡은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 낯선 중년 여인은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고, 네가 경아구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우리 할머니가 요즘 경아랑 학교에 간다고 하도 노래를 부르셔서. 매일 저 교복을 고집해서 힘들게 했는데, 친구 생겨서 좋다고 하시면서…."


그 여인의 목소리 중 '할머니'라는 단어가 내 심장을 꿰뚫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며 내 귀에는 그 하나의 단어만 메아리쳤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거실에 누운 은희의 희고 팽팽하던 손목 위로 섬세하게 감춰져 있던 주름들이 갑자기 깊게 파인 것처럼 선명해졌다. 내 차가웠던 손에 팥빵을 쥐여주던 얼음 같은 손, 쿰쿰한 흙내음 같던 옷 냄새, 아이들이 던진 "미친 것 같아"라는 잔인한 말, 그리고 흑백사진 속 은희의 사진. 그 모든 조각들이 한순간에, 지독하게 잔인한 그림으로 맞춰져 버렸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 아니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모든 진실을 애써 외면하며, 눈을 감은 채 은희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중년 여인의 말은 내가 쌓아 올린 유리 벽을 사정없이 부숴버렸고, 산산조각난 파편들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엄마와 그 여인의 대화는 여전히 이어졌지만, 내 귀에는 오직 박살 난 마음의 파편들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마치 볼륨이 낮아진 TV 소리처럼 웅웅거리는 속에서도 "치매가 많이 진행돼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셔서", "곧 요양원에 가셔야 하는데…", 같은 문장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폐부를 찔렀다. 은희는 마치 다른 세상의 일인 양 거실에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햇살처럼 고요한 그녀의 모습은, 늘 그랬듯이 평온했다.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의 뒷모습이 선명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더 이상 해맑은 소녀가 아닌, 모든 세월의 흔적을 담은 한 노인의 그림자만이 보였다.


졸업을 이야기한 은희는 그 후로 점점 기억력이 나빠졌다. 며칠을 앓고 나더니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흐릿해졌고,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은희가 늘 그랬듯, 문구점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더 이상 그녀에게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 달 뒤, 은희는 세상과 작별했다. 졸업을 준비하듯, 그녀는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어느 비 오는 날,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문구점 앞을 서성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채 길을 걷다보면, 은희가 불쑥 나타나 팥빵을 건넬 것만 같았다. "경아야, 우산 챙겼어?" 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길에는 나 혼자였다. 여전히 열아홉인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큰 상실감 속에 홀로 남겨졌는지 깨달았다. 세상이 다시 나를 툭툭 건드려대는 것 같았고, 더 이상 나를 지켜줄 다 해진 교복을 입은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빗물에 젖은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번졌지만 여전히 남은 푸른 잉크 자국. 그녀가 썼던 '친구'라는 두 글자는 빗물에 닿아 선명하게 번졌다가, 끝내 흐려졌다. 내 손에서 서서히 지워지는 잉크처럼, 은희의 기억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손 위에 남아있던 지워지지 않는 잉크의 흔적을, 마치 마지막 작별의 증거처럼 가만히 응시했다. 그날부터 나는 한동안 비 내리는 날이면 늘 그 자리에 서서, 이제는 볼 수 없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은희를 생각하곤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돌아옴을 애써 기다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녀의 추억이 담긴 골목을 마주할 때면 걸음을 멈추곤 한다.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지는 않는다. 대신 젖은 손바닥에 꾹꾹 눌러 써 있던 ‘친구’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은희가 내게 주었던 건 단순한 팥빵 하나가 아니다. 세상에 대한 용기와 나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미는 법이었다. 빗방울이 차갑게 어깨를 때리는 날, 문구점 처마 밑에서 한 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낡고 해진 운동화 끝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문득 오래전의 내가 보였다. 나는 주머니 속에 따뜻하게 품고 있던 팥빵 하나를 꺼냈다. 은희가 그랬던 것처럼, 차갑지만 따뜻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팥빵을 내민다.


"팥빵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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