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짓국

by 이십삼

나는 귀신을 본다. 그것은 허상 따위가 아니다. 내 삶을 갉아먹는, 가장 날 것의 현실이다.


거울 속 깊은 어둠 너머, 모든 불이 꺼진 방 문 앞에서 그것은 서 있었다. 부스스한 긴 머리칼, 깊게 패인 눈물자국, 찢어진 옷자락, 피범벅의 치마, 그리고 불어터진 맨발. 그것은 분명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작고 앙상한 몸에서 피어나는 기괴한 악취는 눅진한 비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를 연상케 했다. 그 중 견디기 가장 힘든 건, 그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터져 나오던 흐느낌이었다. 그것은 울음이라기보다 진한 국물 속에서 부글부글 끓다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 같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썩은 시체 냄새처럼 코끝을 맴돌며 섬뜩하고 진득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직감했다. 아니, 끔찍하게도 알고 있었다. 나를 이토록 몸서리치도록 두렵게 만드는, 너무나 익숙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어이 외면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좀 꺼져 제발."


속으로 수없이 외쳐보았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뜨거운 것이 두 눈을 채웠다. 목울대가 메여 말이 나오지 않는 막무가내의 순간이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뜨겁고 짠 눈물은 어째서인지 오래된 핏국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마치 나의 것을 대신하는 듯 아팠다. 그 가녀린 흐느낌은 나의 내면에 스며들어 기어이 그녀와 함께 울고 싶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것이 보였던 것은 아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술만 마시면 어김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아빠는 그날도 내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나는 벌거 벗겨진 채 현관문 앞에서 그에게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시선은 창문 밖을 향했다, 마치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때부터였을까? 그것이 보이기 시작한 게.


또 다른 어느 날이었다. 사춘기 시절 처음 생리를 시작했을 때, 생리대를 하는 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피에 절은 치마를 입은 채 나는 학교에 갔고, 내가 지나간 자리 아래에는 핏물로 가득했다. 그날 이후, 반 아이들은 모두 나를 선짓국이라고 불렀다. 나의 존재는 그 차갑고 비린 세 글자로 뭉개져 버렸다. 그때부터였을까? 그것이 보이기 시작한 게.


그것은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제발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뜨거웠다. 마치 피처럼.


두려움에 떨며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시선은 강하게 이끌리듯 방 한편의 낡은 거울에 꽂혔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었다. 초라할 만큼 작고, 못난 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아닌 무엇인가가 있었다. 흐릿한 거울 속에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그것이 있었다.


순간, 거울 속의 그것이 고개를 기괴하게 비틀었다. 동시에 거울 전체가 마치 진흙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의 말끔한 얼굴이 순식간에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에 잠식되고, 깨끗하던 두 뺨 위로 깊게 패인 눈물자국이 피처럼 번져 나갔다. 나의 옷깃은 갈가리 찢겨나가 피범벅의 치마로 변했고, 가지런하던 발은 짓무르고 불어터진 맨발이 되어갔다. 경악 속에 손을 들어 올리자, 거울 속 그것의 피투성이의 팔이 똑같이 움직였다. 나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뒤틀리며 차가운 멍 자국으로 물들었고, 나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던 비명은 거울 속 아이의 일그러진 입꼬리에서 끈적한 울음으로 쏟아져 나왔다. 일그러진 슬픔과 비명이 지금 나의 형체와 완벽히 겹쳐짐을 느꼈다.


그때, 견디기 힘든 악취가 다시 한번 내 코끝을 강타했다. 눅진한 비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오래전 잊고 싶었던 차가운 '선짓국'의 냄새. 이번에는 달랐다. 그 모든 비릿함이 거울 속 그것의 형체로부터가 아니라, 내 혈관 깊은 곳에서부터 역류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토록 지독한 냄새의 근원지가 방문 앞의 아이가 아닌, 바로 내 살갗 아래, 내 숨통 안에 있었다는 것을.


사실 거울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내 앞에 선 그것은, 아니 너는

사실 나라는 걸.


그 인간에게 허벅지가 터지도록 맞고 벌거벗은 채로 울고 있던 나의 모습. 피범벅이 된 치마를 숨기려, 한겨울에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오던 나의 모습. 친구들에게 선짓국이라 놀림받으며, 학교 화장실에서 매일 울던 나의 모습. 그 모습들을 네가 하고 있는 걸.


너만 보면 그때가 선명하게 떠올라. 잊고 싶은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잊혀지지가 않아. 어쩐지 너만 보면 자꾸 눈물이 흐르더라.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쳐 봤자 다시 돌아올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천천히 발을 옮겨 너에게 다가간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너의 모습은 선명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너의 산발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긴다. 조그맣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는다. 차마 뱉어내지 못했던 미안함과 후회, 그리고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너는 작았고, 참 예뻤다.


어느 덧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눈물을 흘리던 얼굴에 희미한 빛이 스치는 듯했다.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그녀는, 사실 나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싶었던 나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녀를 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차갑던 몸이 점차 온기로 채워지고, 그녀의 윤곽이 조금씩 진해졌다.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울던 그 작은 아이를, 나는 이제야 품에 안아주었다. 얼어붙은 피가 녹아내리듯, 붉은 온기가 내 몸 안을 천천히 돈다. 방 안에는 빗소리만이 남았고 그 소리는 자장가처럼 조용히 창문을 두드렸다. 과거의 나를 품에 안은 채, 열일곱의 나는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또 그녀가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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