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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머리 앤 Feb 26. 2024

오로라의 춤

               

 

    처음 프랭크를 보았을 때, 그는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의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아주 큰 키에 강한 인상을 풍기는 인디언으로, 그의 얼굴에 패인 주름은 꼭 고목의 갈라진 겉껍질 같았다.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그를 나는 꼭 장승 같다고 생각했다. 


캐나다에서 처음 시작한 비즈니스가 작은 호텔이었는데, 프랭크는 바로 그 호텔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였다. 호텔의 새 주인이 되어 직원들과 첫인사를 나누던 날, 난 유독 그가 어렵게 느껴졌다. 과묵함과 그가 풍기는 위엄 때문에 처음엔 서먹하게 시작했지만, 그래도 모든 게 서툰 햇병아리 주인인 우리에게 그는 상당히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느 겨울밤, 오로라(northern lights, 북극광)가 떴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달려 나간 난 거대한 하얀 연기가 넘실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분명 북쪽 어딘가에 거인의 오두막이 있고, 저건 아마 그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일 거야! 그런 상상을 해가며 한참을 올려다보던 난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호텔 라운지 바로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그날은 프랭크의 아내인 프렌도 와 있었다. 흥분에 들뜬 내가 방금 본 오로라와 거인의 집 이야기를 해주자, 프렌이 웃으며 오로라는 dance of spirits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생명의 불꽃을 지니고 사는데, 죽을 때 몸에서 빠져나간 그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저렇게 오로라가 되어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미스터리로만 남아있던 한국에서의 내 어린 시절 기억을 불현듯 떠올렸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지붕 위로 할머니의 혼불이 떠올라 언덕을 넘어가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 후로 조용조용 어른들의 입을 통해 할머니의 임종이 예언처럼 퍼졌고, 곧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동네 어른들 말에 따르면 혼불의 모양은 여자가 둥근 모양의 푸른색 불이고, 남자는 꼬리가 달린 유성처럼 생겼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바로 이 혼불을 지니고 사는데, 이것이 빠져나가면 죽게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동안 난 내 속의 혼불이 나갈까 봐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내 과거 어렴풋한 의문으로만 남아있던 그 혼불에 대한 이야기를 이 먼 캐나다에서 프렌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우리 집 지붕 위로 나갔다는 할머니의 혼불이 도대체 어디로 갔을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바로 저 오로라가 됐던 거구나! 


그 순간 난 같은 생각을 공유한 이들과 어쩜 우린 한 뿌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낯선 땅의 사람들과 내가 만나기 전부터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는 깨달음. 그날 밤 오로라를 통해 난 처음으로 그들과 내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 속에 남아있던 프랭크에 대한 서먹함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같이 일한 지 2년여가 지난 어느 날, 프랭크가 갑자기 식도성정맥류 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다. 응급실로 달려간 난 도시 병원으로 이송되기 위해 헬기 앰뷸런스를 기다리는 그를 배웅했다. 과다출혈로 백지장처럼 하얘진 프랭크의 얼굴을 본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지만, 난 연신 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괜찮을 거라고 그와 나 자신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다음날 날아온 소식은 수술 중 시작된 출혈로 결국 그가 중환자실로 들어갔다는 거였다. 그의 회복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 중에, 그 추운 겨울 그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을 못하고 보낸 게 그렇게 마음에 걸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그가 내 꿈으로 찾아왔다. 내가 차린 밥상 앞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가 잘 먹었다는 듯 흡족한 웃음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뒤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난 꼼짝도 못 한 채 누워 혼잣말을 했다. 프랭크가..갔구나! 


내 직감처럼 프랭크의 사망 소식이 곧바로 들려왔다. 그날 이후로 하늘에 뜬 오로라를 볼 때마다 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안부를 묻는 버릇이 생겼다. 프랭크! 잘 지내요?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고, 그저 서늘한 기운만이 내 가슴에 스밀 뿐이었다.


오로라에 관해 물으면 여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하곤 했다휘파람을 불면 오로라가 더 신이 나 춤을 추니까, 휘파람을 불라!며 즐거워하는 이도 있었고, 외딴집에 사는 어떤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극도로 싫어라 했다. 오로라가 뜰 때면 우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꼭 귀신이 우는 소리 같아서 너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이는 ~ 쉬이! 우~ 쉬이이! 들려오는 오로라의 소리가 파도 소리보다 훨씬 더 평화롭다고도 했다. 


똑같은 소리인데 왜 저마다 다르게 느낄까? 결국 오로라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뿐, 누구 말이 맞고 틀리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이와 응어리가 남은 채 이별한 사람은 오로라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거고, 아닌 사람은 평온함을 느끼는 듯했다. 오로라를 볼 때 내 가슴으로 서늘함이 스몄던 건, 아마도 내가 프랭크를 완전히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해서인 듯했다.


그렇게 프랭크가 떠난 지 딱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청소를 하는데, 프렌에게 가줘! 제발.하는 프랭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귀로 들은 말은 아닌데, 마치 내 영혼의 귀가 명확히 알아듣는 느낌이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거라서 처음엔 스스로도 의심이 갔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그 속삭임이 너무도 선명했다. 


결국 난 하던 청소를 멈추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프렌에게 가자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그날은 할 일이 너무 많다며 다음에 가자고 미뤘다. 안 돼. 당장 가야 해. 프랭크가 나한테 가달라고 부탁한단 말이야. 내가 이렇게 우길 때면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남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모든 일을 미루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마트에 들려 소고기와 닭가슴살, 초콜릿, 그리고 커다란 꽃다발을 사 들고, 우린 서둘러 프렌의 집으로 향했다. 


가보니 얼마 동안 쌓인 눈인지 그득한 눈이 현관문을 막고 있었다. 꼭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집 주위로 사람 발자국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며 집으로 들어간 내가 세 시간을 프렌과 수다를 떠는 동안, 남편은 밖에서 눈을 치워 사람들이 쉽게 그 집에 찾아들도록 길을 내기 시작했다. 


프렌의 얼굴엔 여전히 슬픔이 가득했다. 슬퍼하는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비벼대는 개를 쓰다듬으며 프렌이 말했다. 이 개는 프랭크 거고, 프랭크가 죽던 밤 내 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어. 혼자 가기 싫은 프랭크가 그녀의 개를 데려갔고, 자기 개를 프렌에게 남겨놨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하던 프렌이 갑자기 소리를 낮추더니, 그런데 프랭크가 아직 못 떠나고 이 집에 남아있어.라고 속삭였다. 내가 뭐라 대꾸를 못 하고 빤히 바라보자, 그걸 증명하겠다는 듯 프렌이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집안 여기저기로 날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욕실 벽과 주방 벽, 그리고 갓등의 얼룩까지 모든 얼룩에 프랭크의 얼굴 형상이 보인다며 내게도 보이는지 물었다. 내 눈엔 그저 얼룩으로만 보였지만, 프랭크가 너무도 그리운 그녀에겐 그리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난 고개를 끄덕여줬다. 봄이 오면 또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프렌을 꼭 안아 주고는 우린 짧은 방문을 마치며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딱 6일이 지났을 때, 남편이 너무도 놀란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프렌이 지난밤에 그냥 자다가 죽었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래서 그때 프랭크가 내게 왔던 거구나! 프렌에게 남은 일주일, 그 마지막을 꽃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던 프랭크의 간절한 마음이 내 마음과 닿았던 거구나! 그때 그 속삭임을 무시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잠시 말을 잃었던 난 겨우 입을 뗐다. 

근데..이상하게도 이번엔 안 슬프다. 인제 프렌도 오로라가 됐으니, 프랭크와 만나서 춤을 추겠지? 

그렇게 프렌이 떠난 날, 난 내 속에 남아있던 프랭크를 마저 편히 보내주었다.


늦은 밤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어 밖을 보니, 밤인데도 창밖이 낮처럼 환했다. 혹시 오로라가 떴나 싶어 뒷마당으로 나가보니, 쌓인 눈보다 더 새하얀 달빛이 세상을 정갈히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름달 옆으로 무지개 모양의 오로라가 하늘에 길게 걸려 출렁이고 있었다. 반가움에 모두 잘 있어요?라고 묻자, 우리 할머니, 프랭크, 프렌, 그리고 그들의 개까지 둥글게 모여 신나게 춤을 춘다.

막연한 공포로만 남아있던 내 어린 시절의 혼불과는 달리, 여기서 만난 혼불의 춤인 오로라는 이곳에 사는 낯선 사람들과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이 낯선 북쪽까지 와 외로움에 힘겨워하던 내게 오로라는 어떤 낯선 이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줬고, 그렇게 난 오로라를 통해 점점 이 낯선 세상과 친화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갈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오로라가 넘실대는 하늘을 향해 내가 휘파람을 불자,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오로라가 연신 모양을 바꾸며 너울거린다.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며 난 다시 휘파람으로 화답한다. 

저 오로라 아래서 난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언젠간 나도 저 은하수로 춤추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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