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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머리 앤 Mar 05. 2024

한국에서 온 외계인

                   

   스팅이 부르는 ‘잉글리쉬맨 인 뉴욕(Englishman in New York)’이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후렴구가 귀에 꽂히듯 들어온다. 계속 반복되는 이유도 있겠지만,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가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외계인, 이 땅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외계인, 나는 뉴욕에 사는 영국인.” 


이렇게 반복되는 후렴구를 듣다 보면, 꼭 내 이야기만 같아 나도 모르게 가사를 ‘캐나다에 사는 한국인’으로 바꾸어 흥얼거리게 된다. 


노래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면 영국인인 그가 왜 미국에서 자신을 외계인이라 느끼는지 그 이유가 나오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자기는 영국식 억양으로 영어를 구사할뿐더러, 미국인은 아침으로 커피와 토스트를 먹지만 영국인은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신다는 등이 이유였다. 


그 정도 차이로 자신을 외계인처럼 느낀다는 게 좀 엄살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론 모국을 떠나 낯선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이민자들의 소외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어 공감이 가기도 한다.


영국인이 영어권 나라에 와서 느끼는 소외감이 저 정도라면 영어와는 전혀 족보부터가 다른 한국어를 구사하고, 아침으로는 김치와 밥을 먹는 한국 이민자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익명 속에서 살아가는 게 요즘의 생활이다. 하지만 내 나라에서 살 땐 이 정도의 단절감은 한 번도 느껴보질 못했었다. 


인파가 밀리는 시장통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비록 소란스러움에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진 못해도, 그래도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내가 아는 말로 떠들고 있으니, 나와 세상 사이에는 언제나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어디에서도 그런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거리를 걸을 때도 왜 이토록 낯선지, 어느 곳엘 가든 난 나 자신이 ‘외계인’ 같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속한 사회와 소통이 되질 않으니 난 어느 틈에도 끼일 수가 없었고, 그러니 언제나 말이 없고 겁에 질린 이방인으로 그저 바깥을 맴돌 뿐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선 땅이 이곳이니 어떻게든 이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일단 말을 할 줄 알면 이 사회와 소통이 될 것이니, 영어만 배운다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 


그래서 영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어를 가르쳐 줄 변변한 학교 하나 없는 시골에 자리를 잡고 보니, 그도 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 하지 않던가? 엄마 없는 심청이를 심봉사가 젖동냥으로 키웠듯, 나도 그만큼 절실한 심정으로 동네를 돌며 영어 동냥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언젠가 친정엄마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는 그런 내게 더 뚜렷한 목표를 갖게 해줬다. 

“자기 손가락에 붙은 밥티기라고, 그 밥티기 뜯어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쉬운 거여.” 

즉, 손에 익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제일이란 말이었다. 


내 손가락에 붙은 밥티기는 환자를 간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다시 간호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영어를 그 수준까지 끌어올리자 굳게 마음먹었다. 


모든 시험을 통과해서 캐나다 간호사가 되기까지는 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그래도 이 사회가 비로소 날 받아들였다는 안도감은 그보다 더한 세월이라도 대가로 치를 만큼 내겐 큰 것이었다. 


간호사면허증을 받던 날, 난 그동안 내게 영어를 나눠준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더 이상 외계인이 아니라는 느낌은 내 속을 두려움 대신 자신감으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병원에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신감은 태양 볕에 사라지는 아침이슬처럼 쉽게도 내게서 빠져나가 버렸다. 


내가 뛰어든 세계는 먹고 먹히는 정글 같았고, 내 짧은 영어로는 살아남기가 너무도 버겁기만 했다. 책임간호사로 일해야 하는데 전화 받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벨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여러 부서 사람들과 함께 회의할 때, 화가 난 보호자를 설득해야 할 때도, 내가 가진 언어의 장벽은 나를 매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하물며 난 환자를 부를 때 흔히 사용하는 그런 사소한 호칭조차도 따라 하기가 힘들었다. 캐나다 간호사들은 항상 달링, 허니, 스윗디, 스윗하트, 마이레이디, 마이버디 등으로 환자를 불렀다. 


남편도 자식도 아닌 남에게 꿀이니 사탕이니 하는 이런 달콤한 호칭을 남발하는 게 어색해 난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내 마음속에 환자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이 먹고 병든 그들의 삶에 측은지심이 있었고, 그 삶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내 한국적인 정서로는 말은 딱 마음만큼만 나와야지 마음보다 과한 표현은 말의 사치인 것만 같았다. 이렇듯 사람이 지닌 정서라는 건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영어가 실상은 영어의 겉옷만 빌려 입은 한국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었다. 결국 언어는 배워 익혔어도 내 정서가 바뀌지 않았으니, 난 여전히 이들과 단절된 외계인으로 살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들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벽이 저 산만큼이나 높게 느껴졌다. 그 단절감 속에서 그나마 날 버티게 하는 건 내가 돌보는 환자들이었다. 


비록 달콤한 말로 부르진 못하지만, 그래도 난 눈길로 손길로 그들에 대한 애정을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다른 간호사들이 크게 말로 하는 건 못 알아들어도 되레 내가 마음으로 하는 말을 더 잘 알아듣는 듯했다. 


언젠간 93세인 할머니가 약도 거부하고 산소 줄도 다 빼버린 채 이틀 동안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한 달 전에 72년을 같이 산 남편을 먼저 보냈으니, 마음이 얼마나 허하고 약해졌을지, 그만 가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거부하며 죽음을 기다린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기에, 난 그 할머니를 그냥 뒷짐만 지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간호사를 외치는 할머니에게 막상 다가갔지만 어떻게 설득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영어로 설명하기도 벅찬데 독일 출신인 이 할머니는 독일말만 하고 있었다. 


참 신기한 게 오랜 세월 영어를 하며 살다가도 죽음이 가까이 오면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마더텅(mother tongue)으로 돌아가 버린다. 즉, 자기 엄마의 혀로부터 배운 말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도 일종의 회귀본능이리라. 태어난 곳을 찾아 강물을 거꾸로 오르는 연어처럼, 사람도 어디에 가서 살든 결국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영어를 배워 익혀도 내가 늙어 죽음을 앞두면 결국 내 혀도 한국말만 기억할 것이다. 


한참을 난 어설픈 영어로 설명하고 할머니는 독일말로 뭐라 하시고 도저히 말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조용히 할머니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분의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속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 내 마음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한국말로 했다. 


“할머니! 그만 떠나고 싶어 하는 것 알아요. 제가 할머니 앞에 다가선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93년을 걸어온 삶, 그 길의 마지막 몇 발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거든요. 그러니 제가 돕도록 해주세요.” 


이렇게 속으로 말하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Let me help you, please!(제발 할머니를 돕게 해주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눈가가 촉촉해진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우리가 제공하는 모든 간호를 다시 받기 시작했고, 그리고 3일 후 점심시간에 차 한 잔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사람의 눈은 혀가 말할 수 없는 걸 말한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상대를 들여다본다면, 이런 짧은 접촉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연결될 수 있다. 


그날 할머니와 난 언어를 초월해 모든 걸 이해했으며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선 이 땅에서 내가 다른 사람과 최초로 연결된 순간이었다. 


결국 언어란 가슴에서 나오는 우리의 마음인 것이었다. 귀에 듣기 좋은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담긴 말이라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어 버린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마음의 직항로가 있는 것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이티(E.T)라는 영화를 보면 외계인 이티와 지구에 사는 엘리엇이라는 소년이 언어를 초월해 서로 마음의 교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의 포스터로 쓰였던 바로 둘이 손가락을 접촉하는 순간이다. 아마 그 감독도 이 마음의 직항로를 이미 알았던 듯하다. 


지금도 여전히 난 언어의 장벽이 있고, 이들과는 다른 한국적인 정서를 지니고 사는 외계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단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그 비밀의 통로를 알았으니, 그저 조용히 환자의 침상에 앉아 손가락 접촉을 시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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