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개발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평화는 강력한 힘으로 지킬 수 있을까!?
[원자폭탄의 아버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놀란의 영화를 좋아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3시간의 러닝타임이지만 해외에서도 엄청 높은 평점으로 시간이 아깝지 않은 최고의 영화라는 평이 있다. 8월 15일 광복절 개봉이라니 노렸나?
<오펜하이머 포스터>
경건한 마음으로 오펜하이머에 대해서 다루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사실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과학을 진짜 좋아하는 덕후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큰 역할을 한 그였지만, 원자폭탄을 혼자 만들진 않았다. 총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들어봤는가!?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원자 폭탄의 개발을 목표로 극비로 시작한 프로젝트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이름은 맨해튼이지만 미국의 여러 주에 시설에서 각자 개발을 했다.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사막에서 실험을 했고 오펜하이머는 그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다.
30곳이 넘는 연구 시설에서 정보를 취합해 필요한 곳에 지원을 했다. 원자 폭탄 개발의 총사령관이라고 봐도 좋다. 고작 38세의 나이라니 역시 천재는 다르다. 당시 물리학은 속도, 가속도에 질량, 힘을 계산하는 운동량 보존, 에너지 보존 법칙 등 고전 물리학에서 양자에 대한 물리학으로 넘어가는 시대였다.
오펜하이머는 총명 받는 과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고 당시 원자폭탄 실험을 하던 연구자들에게 총책을 부탁했으나 거절했고 그들의 추천으로 오펜하이머가 임명되었다. 금수저에 하버드 출신인 그는 항상 원자 폭탄을 개발하면서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후회했다고 하며 끔찍한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와 관련된 루머]
오펜하이머가 주도적으로 개발하여 탄생한 원자폭탄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약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하게 했다.
<원자폭탄 떨어진 뒤 나가사키의 모습, 픽사베이>
원자폭탄 투하 결정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원자폭탄의 개발 후 앞으로의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며 힌두교 경전을 인용하며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인 죽임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미국을 위해 일했지만, 그는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1930년대에 공산주의 행사에도 참석했다.
1950년대 적색 공포에 FBI의 조사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공산주의자와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보안 허가를 박탈당했다. 1952년에는 자신이 만든 폭탄보다 1,000배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수소폭탄의 개발은 미국과 소련의 핵 경쟁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보면 그는 원자 폭탄 개발에 대한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죽고 나서 결국 68년 만에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벗었다.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가 있지만 결코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의 관계다.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해 인류는 나중에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작가의 논평]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가 담겨있다. 2억 달러의 제작비가 들었고 덩케르크에도 출현했던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를 연기했다. 핵폭발 장면도 CG 없이 촬영했다고 한다.
과학계에 원자핵에 대한 이해와 양자역학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자신을 따르는 과학자들을 양성했고 원자 폭탄을 개발하고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와 군비 경쟁 방지를 지지했다. 하지만 원자 폭탄을 개발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로 인해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가끔 역사적으로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원자폭탄이 없었다면 미국과 연합군은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해야 했고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되었을 수 있으며,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추가로 사망했을 수 있다. 한국의 해방도 늦어지거나 한국이 미국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원자폭탄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소련이 일본에 대해 강한 역할을 하여 아시아의 지정학적 균형이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 핵무기도 다른 국가들이 계속 연구를 해서 소련이 만들었다면 공산주의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추측이지만 원자폭탄의 개발과 사용이 2차 세계대전의 결말과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오펜하이머가 단순 물리학자로 원자 폭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사회 문제와 종교 그리고 그림, 음악, 시에도 철학이 있는 과학자라는 인간적인 모습도 살펴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궁극의 무기를 만들었지만 정치인에게 빼앗기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게 궁지에 몰리는 모습도 기대된다.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개발과 세계의 핵무기 개발은 경쟁은 핵무기 보유국 사이에서 핵전쟁을 피하려는 의지가 발생했다. 먼저 쏘면 서로 핵무기 발사 할 것이 당연한 상호확증파괴(MAD)에서 전쟁을 시작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냉전이 찾아왔고 이념에 따라 국소적인 충돌과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뒤에서 대리전쟁을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가설이지만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소련의 역할이 커져 한반도의 분할과 북한에 대해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었기 때문에 분할의 경계나 방식이 달라졌을 수 있다. 한국 전쟁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전쟁은 빨리 끝나야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도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버티기 힘들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핵무기를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의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듯이 위급한 상태에서 핵무기에 몰입될 수 있는 상황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오펜하이머가 (1)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2) 아내와 여동생이 공산주의자로 그들과 연결되었다는 의심받았으며 (3) 원자 폭탄 개발을 후회하였고 (4) 만들고 나서 신냉전의 수소폭탄 개발 등은 반대했다는 배경만 알고 있으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다.
P.S 인터스텔라의 양자역학의 소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