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빌런들

일상 에세이 : 세밀한 행복

by 박매력

학창 시절 나를 돌이켜보면 참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또 잃었다.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던 그 시절, 또래 여자애들 특유의 예민함과 질투심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 나는 늘 조급하고 샘이 많으며 배려심이 부족했다.


어른이 된 후로는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성향도 성격도 제각각인 친구들과 매일 얼굴을 보고, 부대끼며 일 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 취향이 비슷한 친구, 유머 코드가 잘 맞는 친구. 자연스럽게 어울리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다 싶으면 인연을 이어가는 쌍방의 선택에 의한 인간관계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른이 되어서도 마냥 원하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을 순 없었다. 방심할 때 즈음 등장하는 회사의 빌런은 평온하게 잘 세팅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내 일상을 위태롭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위험요소들을 감지하는 눈치센서의 발달과 경험치로 획득한 빅데이터의 영향으로 숨어있는 빌런을 빠르게 식별해 내고 대응하는 능력이 제법 생겼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깨지 못한 최종 빌런은 투명인간처럼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등장해 나를 헤집어 놓는 일상 속 빌런들이다. 가령 출근시간 남의 차 앞에 떡하니 이중 주차를 해놓고는 끙끙대며 몇 분을 밀어보다 포기하고 전화를 걸어 차를 빼달라는 나에게 남들은 잘만 밀던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면서 도리어 짜증을 내는 이웃주민.

친구집에 방문하기 위해 주차창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주차를 했으면 경비실에 와서 보고를 해야지 왜 사람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드냐며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경비 아저씨.

너무 비상식적이라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곤 집에 돌아와 억울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밤잠을 설치게 하는 일상 속 빌런들. 그들은 찰나의 순간 등장해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폭격을 때리는 빌런계의 최종보스들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숨겨져 있던 최종 단계가 하나 더 남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단계의 빌런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가족들에게 별 것도 아닌 일들도 괜히 투덜거리며 짜증을 내는 나, 그러면서 요즈음 내가 예민한 탓이니 마냥 이해해 주고 너그럽게 기다려주길 바라는 나.

지금껏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을 연인에게 지금 네 행동은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잘못된 일이니 네가 이상하다는 걸 인정하라고 납득을 강요하는 나, 그러면서 사랑한다면 전부 이해하고 고쳐주길 바라는 나.

가장 편한, 가장 가까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막무가내식으로 무한한 사랑을 요구하는 나. 이기적인 나, 편협한 나, 마음이 못생긴 나.

주체할 수 없는 기분으로 날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힘들게 하는 못난 내 모습이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최종 빌런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나의 질풍노도 시기를 말없이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감사하면서 누군가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려오면 나 역시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품어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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