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 세밀한 행복
어릴 때부터 나는 예능 보단 드라마를 좋아하는 쪽이었다. 드라마 중에서도 내용이 꽤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등장인물의 서사가 복잡해 중간 회차에서 끼어들어 보려고 하면 쉽사리 줄거리를 파악할 수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봐야 하는 드라마들이었다.
드라마에 급을 나누긴 그렇지만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복장을 하고 나와 현실에선 사용하지 않을 법한 유치한 대사를 던지며, 진지한 상황에서도 껄껄 웃어대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는 도대체 누가 보는 걸까 궁금했다.
드라마가 되었든, 책이나 영화가 되었든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제작되어 웃음을 주는 게 다가 아니라 한층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심오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 진정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지금 생각하면 꽤 편협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덧 삼 십 대 중반이 된 나는 퇴근 후 티브이 앞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드라마나 예능을 찾는다. 때론 회사에서 사람들에 치이고, 집에 오면 가족들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매번 반복되는 이유로 연인과 말꼬리를 잡고 한바탕 말씨름을 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는 순간만큼은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생각 하기 싫어. 잠시나마 현실은 다 잊고 마냥 웃고 싶어.’라는 생각을 하며 채널을 돌린다. 역시 어른들의 세계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른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얼마 전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쉬면서 보내게 되어 요즈음 핫하다는 한 드라마를 보다가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중간에 끄고 말았다. 마치 오늘만 사는 것처럼 다이내믹한 사건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어내는 주인공을 보니 내가 다 진이 빠지고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이다. 몸살 나기 직전처럼 기운 없이 으스스한 기분까지 들어 그대로 소파에 누워 한참 동안 낮잠을 자버렸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책을 볼 때도 감정선이 복잡한 소설을 좋아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복잡한 심리와 내 일상에서는 절대 겪을 수 없는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했고, 그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소설이라는 한 권의 세계는 무미건조한 내 일상의 일탈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책 속에서 내가 겪어보지 않은 흥미진진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을 찾기보다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함께 살고 있는 갓생들이 쓴 에세이를 읽는다.
‘그래, 내가 틀린 게 아니야.’, ‘다들 괜찮은 것 같지만,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행간에서 공감과 위로를 찾는다.
퇴근 후 저녁상 앞에 앉아 밥을 먹는 동안 볼 프로그램을 찾을 때도 그저 시골집에서 소박한 밥 한 끼를 지어먹기 위해 하루 반나절을 보내는 이야기,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일로 웃고 또 고민하며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유명인들의 일상, 소문난 맛집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보통 사람들처럼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며 소소한 수다를 떠는 스타들의 이야기처럼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예능을 본다.
그동안 얕잡아 봐서 미안해요. 이제는 저도, 예능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