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나란 존재, 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면 좋겠다.’라는 생각.
그런 내용의 영화도 있었지.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나란 존재를 그 사람에게서 지워버릴 수 있을까.
아니, 만약 누군가가 내게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우기를 원한다면, 나는 어떨까.
‘그래, 그렇게 해.’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닌데, 나는 당신과의 추억이 너무 소중하고 좋은데... 그래서 지우고 싶지 않은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을까. 기억은 내 머릿속에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함께 만든 것이니까.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이기적인 것 같다. 내 맘대로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내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내 머릿속에서 당신의 기억을 지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간직하고 싶으니까.
길을 걷다 우연히 시선이 닿은 곳에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을 뻔했다. 과거에 알았던 사람과 너무 닮은 모습에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한번 철렁한 마음은 금세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허락도 없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한참을 머물다 갔다. 좋아했기에 몹시도 갈망했고 실망했기에 끝은 허무했던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했기에 뜨거웠던 마음은 철렁했던 심장의 진동을 타고 재빠르게 기억을 소환했다.
문득 그는 날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해졌다.
제멋대로 짐작해 보자면 나처럼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에 대한 기억을 곱씹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있었고, 잠시 알았고, 이내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그 정도의 기억이지 않을까.
끝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열렬히 뜨거웠다고 기억할 나와는 사뭇 다를 거란 생각에 잊고 있던 수치심이 밀려왔다.
그러다 그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어느 영화처럼.
그에겐 그리 중요한 기억이 아닐 테니 아마도 쉽게 허락할 것이다. 문제는 나였다.
그토록 뜨거운 진심을 다했던 사람에게서 겨우 알았다가 스쳐 지나간 별 의미 없는 사람이라는 나약한 기억, 그리고 이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허무함. 나는 이 둘 중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게서 그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나는 이들 중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