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전문가 : 환상 속의 그대
일상 에세이 : 세밀한 행복
어릴 적 나는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대학교와 직장생활을 거치며 숨겨져 있던 외향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긴 했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부끄러움도 많고 말 수도 적은, 흔히 말하는 트리플 A형의 인간이었다.
한 번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중 내려야 할 곳에서 하차벨을 누르지 못해 정류장을 그냥 지나칠 뻔한 적도 있었다. 벨을 누르면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나를 쳐다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같은 곳에서 내리는 다른 분이 벨을 눌러 다행히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고백 한 번 못하고 끝나는 짝사랑을 참 많이도 했다.
내 짝사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이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보게 된 후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성이라는 것에 눈을 떴다.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조막만 한 아이였다.
나는 3반, 그 얜 1반. 그전에도 그 후에도 우린 한 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쉬는 시간, 그 잠깐 복도에서 그 애를 우연히 마주치는 게 정말 좋았다.
운동도 잘하고 활달한 성격 탓에 늘 주변에 친구들이 끊이지 않던 아이였는데 그때의 나는 그 얘와 친해지고 싶다거나 말을 걸어 봐야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연히 마주칠까 일부러 복도를 서성인 적은 간혹 있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라도 그 아이를 마주치면 그날은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아주 아주 운이 좋은 날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5학년 끄트머리에 우리 집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의 첫사랑 이자 짝사랑은 조용히 끝나버렸다.
그 후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나는 종종 짝사랑을 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을 표현한다거나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우연히 학교 주변에서, 복도에서, 매점에서 그들을 마주칠 때면 오랜만에 입은 재킷 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소중한 물건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나는 우연히 떨어진 것 같은 그 행운을 마주하는 게 참 좋았다. 그렇게 스물다섯에 첫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꽤 여러 번의 짝사랑을 경험했다.
이렇게 짝사랑에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서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짝사랑은 장단점이 참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건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일단 애초부터 상대의 마음에 응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처가 없다. 그렇기에 나처럼 겁이 많은 쫄보에게 딱이다.
또 마음대로 시작하고 언제든 마음대로 끝낼 수 있기 때문에 실연으로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할 일도 없다. 물론 사람인지라 가끔 속앓이로 마음이 쓰릴 때도 있긴 하지만 실연의 상처에 비하면 아주 양호하다. 그것 역시 나처럼 정이 많고 미련이 많은 사람에겐 안성맞춤이다.
그 외에도 기대가 없으니 우연히 주워지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점, 내가 좋아하는 멋진 사람을 바라보며 나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동기부여를 준다는 점 등 생각할수록 장점이 참 많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받지 못하는 짝사랑보다는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연애가 훨씬 더 좋지만-
가끔 일상을 보내다 보면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그때의 멋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어떤 모습으로 인해 좋아했다가 알고 보니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도 있고, 이성적인 호감으로 시작했는데 알고 지내다 보니 인간적인 호감으로 마음의 형태가 변해 지금까지도 친구로서의 연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란 짝사랑으로 시작해 짝사랑으로 끝맺음해 버린, 그 당시 나에게는 다가갈 수 없을 만큼 먼발치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씩 떠오를 때면 마음 한편이 몽글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들을 환상 속의 그대라 부른다.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련해지고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진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생각하면 왠지 나도 더 열심히 살아서 그들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다가가지 못했기에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래서 내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 여전히 내 머릿속에 박제되어 버린 사람들. 이따금씩 떠올라 꺼내어보면 마음 한편 같은 자리에 변하지 않고 우직하게 서 있다.
언젠가 한 번쯤 우연처럼 마주치고 싶지만 세상이 아무리 좁다 좁다 해도 그런 건 또 왜 그리 어려운지, 평행선처럼 결코 닿는 법이 없어 더 고마운 환상 속의 그대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겐 그런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발칙한 상상을 하며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