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는 조금, 어른이 된 것 같다.

일상 에세이 : 세밀한 행복

by 박매력

어렸을 때 정말 갖고 싶었던 지갑이 있었다. 동네 문구점에서 파는 천으로 된 삼단 형태의 지갑이었는데 나는 용돈을 열심히 모아 그 지갑을 샀다. 한동안은 그 지갑만 봐도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에 지갑을 두고 내려 다시는 그 지갑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을 참 많이도 했다.

시간을 되돌려 그 버스를 타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되돌려 그날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되돌려 그날 지갑을 들고나가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가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곤 했다.


살다 보면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드물지만 종종 있다. 최근에 내가 느낀 순간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더 이상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다.

사실 뜻하지 않게 정말 안 좋은 일을 겪으면 지금도 한두 번 정도는 생각해 보는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의 나처럼 지독히도 생각의 꼬리를 물며 며칠밤을 지새우진 않는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김멜라 작가의 단편 소설 하나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에는 두 명의 등장인물이 산을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다 생각보다 험한 산에 이내 지치고 만다. 산을 그만 오르기로 결정하고 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오이와 간식을 받게 된다. 시원한 오이로 갈증과 피로를 해소한 그들은 다시 산을 오르기로 결정하고 끝내 정산에 도달한다.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소설보다 그 소설 뒤에 이어진 작가의 인터뷰 부분이었다. 작가는 소설 속 그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연히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정상에 다다르지 못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보지만 어떤 일은 그 시간, 그 방식이 아니어도, 다른 방식과 다른 시간에서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삶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 보면 운명론적인 이야기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나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면 때로는 나의 의지나 의도와 관계없이 행운이 따르기도 하고 반대로 불운이 따르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우연한 행운 앞에서 나는 늘 감사하며 그것을 빠르게 수긍했지만, 반대의 경우엔 꽤 오래 곱씹으며 그 일을 털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요즈음 부쩍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때, 그 모습이 아니라도 언젠가 나에게 찾아올 일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일들을 우연히 만났을 때 지금의 나는, 머릿속에서 수 없이 시간을 되돌리는 가정을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현명하게 대처할지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내가 어떤 깨달음을 얻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조금 더 성장하게 될 나를 상상한다.

아마도 나는 조금, 어른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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