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너를 정말 사랑했어

일상 에세이 : 세밀한 행복

by 박매력

누군가 “국내 도시들 중 어딜 가장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당연히 경주죠.”라고 말할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도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유의 정취가 있는 도시, 빼곡한 빌딩 숲의 점령으로부터 살아남은 고즈넉한 매력이 있는 도시.

사실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기고 나서부터 여타의 이유들은 색이 조금 더 선명하도록 덧칠하는 수준의 부가적인 요소들일뿐이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갔던 건 스물세 살, 대학을 휴학하고 복학을 몇 달 앞둔 때였다.

대학생의 필수코스인 배낭여행도, 애초에 계획했던 토익 점수와 그 밖의 스펙 쌓기도, 이렇다 할 성과 하나 없이 복학을 앞둔 시점에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선택한 국내 여행지, 그것이 바로 경주였다.

집 근처의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고, 경주 안에서도 대중교통으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어 여러모로 갈만 하겠다 싶었다. 또 제주도나 부산보다는 어딘가 유니크한, 아직은 프랜차이즈와 빌딩숲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잘 살아남은 곳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처음엔 2박 3일을 계획하고 떠났지만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혼자 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단 하루 밤 만에 깨닫고, 이튿날 점심을 먹은 후 바로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1박 2일,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오로지 혼자라는 기분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전까지 내 기억 속에 경주는 어린 시절 가족여행으로 딱 한번 가봤던 어렴풋한 느낌의 도시였다.

경복궁과 선릉, 화성행궁 등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역사 유적지가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경주는 뭐랄까, 그간 흔히 접했던 조선시대의 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신라라는 한 국가의 여운이 도시 전체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그 낯선 느낌이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처럼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마침 박혁거세를 시조로 두기까지 했으니 내심 더 정감이 갔달까.


그렇게 혼자 짧은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경주는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후 3~4년에 한 번씩 경주를 찾았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다른 도시들은 갈 때마다 모습이 조금씩 바뀌는데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경주의 모습은 마치 고요한 호수를 품고 있는 잠든 거인의 눈과 같다고.

그랬던 생각이 바뀐 건 가장 최근에 경주를 다녀온 후부터다.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가봤을 황남동이라는 동네, 그곳도 마침내 ‘리단길’의 거센 파도를 피해 가지 못하고 마침내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의 핫플레이스로 탄생해 버린 것이었다.


전부터 늘 아쉬웠다. 경주는 우리나라 도시들 중에서도 독특한 분위기와 볼거리가 많기로 손에 꼽히는 곳인데 왜 이렇게 맛집이나 카페, 특색 있는 기념품 샵이 부족할까. 충분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매력이 있는 도시라는 생각에 그런 점이 항상 안타까웠다.

그런데 황리단길을 입구에 들어서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정신없이 빼곡한 상점들, 그보다 더 빽빽한 사람들, 서울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특색 없는 옷가게, 문구점 같은 개성 없는 상점들. 여기가 서울인지 경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찾고 알아주길 바랐던 경주는 이런 모습이 아닌데, 어쩐지 서글픈 기분까지 들었다.


물론 모든 것이 그대로 일수 없다는 걸 안다.

사람도 풍경도 도시도,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조금씩 혹은 급격히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궁극에는 결국 변하고 만다.

흔히들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여기고 변했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많이 쓴다. 특히 연인사이에서 변했다는 말은 사랑이 전과 같지 않음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정말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중요한 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변하느냐 하는 게 아닐까.

늘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늘 도덕적으로,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저마다 마음속에 자신만의 기준만큼은 확고하게 세워놓아야 한다.

그래야 살면서 간혹 그 기준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평소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더라도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반성하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 기준들은 살면서 조금씩 수정되고 깎이고 보완되며 자신이 생각하는 완성도에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하여 변해가는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무턱대고 세월 따라, 환경 따라, 주변사람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스스로 잘 빚어놓은 가치관에 따라 그 방향대로 변해가야 한다.

그런 변화는 너무 아름답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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