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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숙 Jan 17. 2022

눈 오는 날 저녁

눈 속에 홀로 서있는 갈매나무(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식탁에 앉아 눈을 멀리 바라보면 용왕산이라는 산에 우뚝 서있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름도 알 수 없고 실제로 가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는 나무인데 나와는 늘 마주 보며 서있는 나무다. 지금은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서있다.


   지금,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백조를 춤추는 무희들처럼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머물고 있다. 아파트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솜털과 같은 눈꽃송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간다. 나 혼자 있는 이 시간, 이 공간 안에서 맛보는 우아하고 신비스러운 광경에 황홀하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하다.


   20대에 명동 한복판 빌딩 속에서 만난 첫눈의 기억은 왠지 모를 흐르는 눈물로 기억된다. 빌딩 창밖으로 보이는  눈송이들과 함께 자유롭게 거니는 행인들과 나는 너무 다른 공간 사람 같은 이질감! 눈과 함께 누려야 할 낭만을 포박 당한채 빌딩 안에서의 현실은 왠지 서러웠다. 지금도 첫눈이 올 때면 누군가 만나서 마구 행복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푹푹 쌓여 있는 눈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몇개의 기억뿐이다. 어린 시절 충남 아산 권곡리라는 곳에 할아버지 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문을 여니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였다. 무릎이 빠질 만큼 깊은 눈 속에서 싸리비로 쓸면서 눈을 한 곳으로 모으기도 하고, 나무판으로 눈을 밀어내기도 하면서 우리들은 정말 너무 좋아 함성을 지르며 행복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싸움도  하고 미끄럼도 타면서 그날의 하얀 행복은 꽤나 선명하게 아직도 남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무악재를 넘어 학교를 가야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버스가 다니지 못했다. 독립문에서 무악재를 엉금엉금 걸어가는 우리들은 코가 빨갛게 물든 채 연신 고개를 재끼고  큰 소리로 웃어가며 그 시간의 특별함을 즐기면서 늦은 시간  학교에 도착했고 지각 처리되지 않은 것에 너무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 시절  산 위에서 내려온 줄을 이용해서  미끄러운 언덕 길을 땀을 흘리면서 걸었던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눈이 오는 오늘  유독 생각나는 시인이 백석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언뜻 떠오르지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에는 어둠 속에서 하얗게 눈을 맞고 서있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시구가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일제강점기에  아내도 없고, 고향을 떠나  어느 목수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다.  나목으로 추위에 내리는 눈을 맞고 서있는 나무에 감정이입을  하여  갈매나무에  동일시하고 있다. 슬픔과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눈을 맞고 서있는 갈매나무를 보는 시선과 마음은 어땠을까? 갈매나무가 얼마나 쓸쓸하고 아프게 다가왔을지 그저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에서 본 갈매나무에서 시의 화자가 느꼈을 감정과  집안 거실 창으로 바라본 나무는 아마도 주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한 그루의 평화로운 나무를 연상했을  나와  그 시대를 견딘 시인의 정서와 경험은  비교조차 불가할 것이다.


    거실 창으로 만나는 용왕산의 우뚝 선 나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백석의 시에 나오는 갈매나무를 떠올려  본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아는 어느 목수木手 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서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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