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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숙 Feb 09. 2022

명동 예찬

추억의 우물, 명동을 거닐며

   


   충청도에서 중3 시절, 서울로 전학을 오기 전  서울 방문은 남산식물원과 도서관이 전부였다. 서울에 와서도 주로 학교와 집만을 오갔던 나에게 명동과의 첫 만남 놀람이었고, 그곳은 신천지였다. 고층의 빌딩에서  비롯된 감정이라기보다는 그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빛남과 세련됨 때문에  명동은 나에게 밝음으로 인식되는 대단히 멋진 곳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거리가 가판대로 채워지고 일본인과 중국인이 가득 찬 곳으로 바뀌고 그들을 부르는 언어가 일본어와 중국어로 난무할 거라는 것을~~


   그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발걸음도 힘찼지만, 입은 옷마저도 빌딩들과 어울릴 만한 화려하고 세련되었기에 명동에서의 첫인상은 명동을 기억하는데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지금은 강남과 강북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도심과 변두리의 기준이 머릿속에  있었던 시절이라서 서울의 변두리였고 (지금은 서울의 핫 플레이스) 뚝섬이라 리던 성수동에 살던 나로서는 명동은 서울의  심장부였고 특유의 문화를 지닌 곳으로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명동 뒷골목에는 양장점이라고 작게 간판을 내건 집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성복이 유행할 무렵이었으니 번창한 느낌은 아니었다. 명동 성당과 예술극장, 음악다방 등에서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명동을 향유하는 사람에게는 보거나, 듣거나, 먹거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은 문화의 거리였다.


   명동!!! 밝은 동네답게 곳곳에 자리 잡은 높고 중후하게 자리 잡은 금융에 관련된 건물의 사이사이로 의류와 구두 매장 등은 전국 매출 1위를 꿈꾸며 명동에 속속  입성했다.  20대의 내가 명동거리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된다. 명동교자, 금강 섞어찌개, 명동할머니 낙지,  명화당 김밥, 심원, 가무와 같은 카페, 50년대의 문인들이  삼삼오오 문화담론을 즐겼던 밀다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이자 증거인 명동성당 등 전통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그런 곳에서 20대의 추억을 향유했다.


   그래서 그런 문화가 있다고 생각해서 난 그 거리를 거니는 사람조차도 문화적 수준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무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음악다방에서 노래 부르던 사람들도 라디오가 유행되자 인기스타가 되었고,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이들도 음악을 감상하며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래식도 팝송도, 대중가요도  이렇게  향유된 것이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도  문인들의 명동 모임에서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 텔런트  최불암 님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라는 막걸릿집도 명동에 있었고, 돈 없는 문인들이 외상술을 먹곤 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외상장부를 보니 이름이 안 적혀 있고 특색만 간단히 적혀 있어 돈을 받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예술인들이 많이 모였던 멋쟁이들의 문화사랑방과 같은 곳이 명동이다.


   20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40여 년 동안 명동을 끊임없이 방문했다. 아이들을 낳고 가족들과 함께 지금도 1년에 서너 번은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먹고 중국대사관이 보이는 "가무'라는 카페의 창가에서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나에게 명동은 청춘이 살아나는 공간이기도 하고 서울의 가장 멋진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부터 명동은 바뀌어 버렸다. 즐비하게 늘어선 가판대에선 즉석 음식과 이름 없는 옷, 신발, 액세서리 등이 팔려 나가고 있었고, 거리마다 중저가 화장품을 사려는 사람과 파는 이들의 고성의 외국어만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한국말은 듣기 힘들 만큼 명동은 일본인과 중국인들로 꽉 차 있었다. 한국의 가장 비싼 땅에서 고품격 문화와는  다른 것으로 채워진 세상에서 외화수입을 들먹이는 일이란 정말 어색하고 부조화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코로나가 만 2년이 지나는 시점에 명동교자에 들러 칼국수와 만두를 손님 텅 빈 공간에서  맛보았다. 물론 코로나가 위험하니 한적해서 덜 위험하긴 했으나 줄 서서 먹었던 명동교자의 맛이 그리웠다. 문밖을 나서니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의 명동은 벌써 잠들어 버렸는지 깜깜하기조차 하다.  전체의 어둠은 명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허허로움에 무섭기까지 하다.  활기찬 명동은 어디로 갔나?


   들려오는 소식에 20~30들의 발길이 코로나로 잠식된 명동을 자주 찾는 추세라고 한다.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품격의 명동! 우리나라의   문화가 빛나는 대표적인 거리로 명동이  세계 속에 널리 유명해지는 날을  명동 예찬론자로서 희망하며 그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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