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소대 배치를 받고 나는 논산 훈련소 입영장에서 떨어져 진짜 군대 내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열을 맞춰서 약 30분 정도 걸어갔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주변에서 들려오는 건 헉헉 거리는 소리와 흑흑 거리며 슬픔을 토로하는 소리뿐이었다. 또 여러 사람들의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서 드디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 들어서니 말로만 들었던 혼종의 숟포크 (숟가락과 포크가 합쳐진 그 독특한 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집어 들고 김치와 콩나물, 부대찌개와 밥을 차례대로 받았다. 머릿속으론 TV에서 본 것처럼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절도 있게 밥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잔반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옆에서 처음 보는 빡빡이가 말을 걸어왔다. “야, 너 **고등학교 출신이지?”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속으로 ‘무당인가? 근데 왜 반말이지‘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닌데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자, 그 빡빡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 죄송합니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직도 왜 그때 순간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밥은 정말 너무 맛있었다. 배가 고팠던 건지 아니면 밥에 어떤 특별한 약이 들어간 건지, 나는 요즘 유행하는 “싹싹 김치”라는 말을 실천해 버렸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안 익은 김치도 깔끔하게 비우고 식판을 들고 사람들이 이동하는 곳으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그 후 밖으로 나와 보니 많은 빡빡이들이 대열을 맞춰 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여기 군대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대열에 합류하며 맨 뒤에 서 있었다.
그때 아까 그 무당처럼 느껴졌던 친구가 다시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고등학교에 정아람 몰라요?”
그 이름을 듣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정아람, 그 이름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었다. 바로 내 친한 친구 민식이의 전 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반응이 늦었지만 결국 물어봤다. “어? 어떻게 알아요?” 그 친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람이 남자친구예요!” 그 순간 나는어찌나 반가웠던지. 외롭던 내 마음에 갑자기 연결고리가 생긴 느낌이었다. 그 후 우리는 서로 겹치는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 순간 민식이보다 그 친구와의 우정이 더 깊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의 제일 친한 친구 민식이의 전 여자친구의 현재 남자친구인 선우와의 첫 만남이었다. (선우는 나를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을까?)
인원들이 하나 둘 나오고 대형이 맞춰지자, 나는 내가 5주 동안 지낼 내무반으로 향했다. 내무반은 주소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배정된다고 했고 덕분에 선우와 같은 내무반에 배정되었다. 내무반에 들어가자 우리는 간단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겹치는 관계가 너무 많았다. 한 친구의 누나는 내가 같은 반에서 만났던 친구였고, 또 다른 친구의 여자친구는 내 친구와 친구였다. 마치 수련회에 온 것처럼 우리 모두는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급격히 친근해졌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우리는 곧 단체 샤워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샤워장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데 그때쯤 다가오는 열대야에 나는 씻고 나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땀을 다 흘리겠구나 싶었다. 샤워장 앞에 도착하자 빡빡이들의 무리들이 왔다 갔다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속한 빡빡이 무리도 씻으러 들어갈 차례였다.
그때 빌어먹을 조교가 말했다. “10분.”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10분이라고? 이 많은 인원이 들어가서 옷을 벗고, 샤워하고, 양치까지 하고 다시 옷 입고 나오는데 10분? 말도 안 되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샤워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10분이 지나고 놀랍게도 나는 양말까지 깔끔하게 신은 채로 내무반으로 돌아가는 대열에 맞춰서 걸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정확히 맞춰졌고 여기는 군대이다. 그동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모든 일이 끝나버린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앞으로 매일 이렇게 10분 안에 씻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좀 걱정되었다.
어정쩡한 나의 첫 저녁 점호가 끝나고 처음 듣는 복무 신조를 소리 높여 외치며 잘 준비를 맞췄다. 취침등이 켜지고 나는 두 눈을 꽉 감았다. 그 순간 부모님 생각, 친구들 생각, 그리고 솔직히 전 여자친구 생각까지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러던 중 옆에서 하나, 둘씩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지... 울려면 나도 지금 울어야지…’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고 눈물을 흘려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양 옆을 보니 빡빡이 두 명이 거의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울어야 할 것 같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왜일까?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눈물이 꽤 많은 편인데 그 순간 왜 울지 않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군생활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아니, 사실 정신이 나간 채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