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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장바구니 목록: 서울 집 (5년 전 담음)_04

by Posy 포지

지난 연말 사주를 봤을 때 내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운 좋게도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에 합격했다.



단 한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근무지가 지방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첫번째 직장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면, 더 이상 나에게 근무지 위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였기 때문이다.



장장 3개월에 걸쳐 네 번의 면접을 본 끝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졸업한 지 2년도 되지 않았는 데 두번째 직장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미리 보아두었던 오피스텔에 바로 월세를 얻었다.



이직한 회사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회사 자체도 좋았지만, 사실 위치한 지역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지방 소도시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집에서 걸어서 백화점도 가고 영화관도 갈 수 있었다.




SE-C2E5BBBA-C28E-42ED-9ABA-55759E5128C9.jpg?type=w773 금요일 퇴근하고 혼영하는 게 소소한 재미였던 시절





도보 거리에는 스타벅스가 세 개나 있었다. 신축 오피스텔에 살다보니 거주 만족도도 높았고, 서울에 비하면 월세도 비싸지 않았다.



"이 정도 생활이라면, 만 점을 줘도 모자라지 않겠다."



그랬던 나였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지방 생활을 한 지 3년 쯤 지나자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이 내가 조금은 성장했기 때문에, 나의 기준과 눈높이가 달라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좋은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 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와는 별개로 '나'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지방이라는 지역적 한계보다는, 그에 수반된 환경과 주변 사람들의 마인드셋이었다.



- 주변 아파트는 투자 가치가 낮아 넓은 시야를 갖기가 어려웠고,


- 주변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자기 성장에 크게 관심 없었다.



지방 비하 발언이 아니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경험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당시 세계 시총 10위 안에 들던 거대 글로벌 회사로 (지금은 순위가 많이 바뀌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서울 상위권 대학뿐 아니라 아이비리그, 영국, 싱가폴 등 해외 명문대 출신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지방에 정착한 순간 그 생활에 만족하며 머물렀다. 결혼도 빠르더니 애도 일찍 낳았다. 내 또래들 중 결혼조차 하지 않은 여직원은 나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신축 브랜드 아파트를 3-4억이면 충분히 살 수 있었고, 높은 연봉 덕분에 삶의 만족도는 충분히 높았을 것이다. 집 주변의 좋은 인프라를 누리며, 다들 좋은 차를 몰고 다녔다. ‘여기서 이렇게 살아도 충분히 좋지 않나?’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했다.



내가 회사를 다니던 시절 그 지역에서 나름 대장 아파트 중 하나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국평 매매가가 5억이었다. 그 신축 아파트는 전국 부동산 폭등기에 살짝 오름세가 있었지만 2025년 가격은 다시 분양가 수준으로 돌아와있다. 서울이 불장이라고 난리치는 지금 이 시점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다. 이 곳에서의 삶은 편하지만, 멈춰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반면에 지방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이직을 했다. 그건 단순히 서울과의 거리나 연고가 있고 없고 등의 이유를 너머, 개인의 성장 가능성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회사에 입사할 때 직원들은 대다수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커리어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전까지 살아온 삶은 비슷했을 지 몰라도, 마인드셋의 차이가 각기 인생의 방향을 갈랐다.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고, 비슷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로 주변을 채우고 싶었다. 그 첫번째 단계가 일단 서울에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은 돈도 없고 재테크 지식도 없었지만, 서울에 청약을 넣으려면 일단 서울 어딘가에 주소지를 두어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 서울 본사로 근무지를 옮겼고,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서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내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여준 것 같았던 팀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조건을 붙였다. 일주일에 두번은 지방에 있는 연구소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분명 회사에서 승인 받을 때는 그런 조건이 없었는 데, 속좁은 상사가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었다.



“아니 밑에 애들이 보는데, 그래도 얼굴을 비춰야 리더의 위신이 서지 않겠어? 가끔 와서 애들 일 잘하는 지도 봐주고 그래야지. 세 번 오라고 안할테니 두 번은 내려와서 자리 지켜요.”



상사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이상한 말투를 구사했다. 본인이 팀장이면서, 늘 책임은 중간관리자에게 떠넘겼다. 우리 모두의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에, 정작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팀장이 왜 또 저러는 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그렇게 나는 주 3일은 서울, 주 2일은 지방으로 출근했다. 지방에 내려가는 날은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30분 기차를 탔다.



당시 나의 동료가 육아휴직 중이라 일이 매우 많았다. 야근이 선택이 아니라 확정인 시절이었다. 서울 안에서의 이동은 문제가 없었지만, 지방의 연구소까지는 기차역에 내려서도 마땅한 대중교통이 없어서 무조건 택시를 타고 갔어야 했다. 그렇게 일하고 서울 집에 도착하면 밤 11시, 혹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 시절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그렇게 못생겨 보일 수가 없었다.




SE-B0658589-7F0B-4D9F-A82F-BD646108A701.jpg?type=w773 퇴근길 기차역











그런 생활에 질릴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나는 서울에서만 일할 수 있는 현재의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다시는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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