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면 지난 권력에서 위세를 부리던 사람들이 한순간 힘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권력에 의해 험한 꼴을 당하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자신의 무력에 근거하지 않은 권력의 명성처럼 취약하고 불안한 것은 없다”고 했다. 현재의 권력이라도 그 힘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면 취약한 법인데, 하물며 지난 권력자에 기대어 호가호위했던 사람들의 종말이야 말해 무엇하랴.
혁명적 신법으로 변방의 약소국을 강대국으로 도약시켰으나, 자신에게 힘을 주었던 군주가 죽자 모든 권세를 잃고 도망자의 신분이 되었다가 죽은 이후에도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은 인물이 있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상앙(商鞅)이다.
상앙은 위(衛)나라 왕의 서자 출신으로 젊은 시절 위(魏)나라의 재상 공손좌(公孫痤)의 식객으로 있었다. 공손좌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적당한 시기에 왕에게 천거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문안을 온 혜왕(惠王)이 다음 재상으로 누가 좋겠냐고 묻자 공손좌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상앙을 추천했다. 혜왕은 국정 경험도 없는 젊은 상앙을 재상으로 등용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고, 혜왕의 심중을 파악한 공손좌는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려면 죽이라고 조언했다.
공손좌가 죽은 이후 혜왕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상앙은 진(秦)나라의 젊은 군주 효공(孝公)이 열성적으로 인재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로 망명했다.
상앙을 만난 효공은 세 번의 면담 끝에 상앙이 나라를 일으킬 인재라는 결론을 내리고, 파격적으로 재상에 등용하여 일대 개혁을 추진했다.
상앙이 추진한 신법은 단기간에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것이었는데, 방법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특히 귀족들의 기득권 박탈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귀족들을 중심으로 반개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상앙은 효공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고 신법 추진을 강행하였고, 법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요참형(腰斬刑)과 같은 엄한 형벌이 가해졌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지, 변법이 강행되던 시기의 위수(渭水)는 죽은 사람의 피로 붉은색을 띠었다고 한다.
이 무렵 진나라 태자가 사형선고를 받은 왕족을 숨겨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법에 따르면 범죄자를 숨겨주는 것은 범죄자와 같은 형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어 태자는 사형당할 처지였으나, 당시 진나라의 법은 태자를 죽일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상앙은 신법이 백성들에게 권위를 가지려면 예외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태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대신 그를 보좌하는 공자 건(虔)의 코를 베었다.
효공의 형이자 태자의 백부인 공자 건은 이후 상앙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태자도 이 사건을 계기로 상앙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이처럼 법이 추상같고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니, 정치는 맑아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으며, 진나라 백성은 법을 두려워하여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았다. 또한, 재정은 튼튼해지고 군대는 갈수록 강해져 천하의 제후들은 진나라 왕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훗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바탕이 이때 마련되었다.
나라가 안정되고 강국으로 변모하면서 상앙은 여세를 몰아 영토 확장에 나섰다. 먼저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서(河西)의 땅을 진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이후로도 계속 압박을 가하여 과거 진나라를 압도했던 패권국 위나라는 국운이 크게 쇠해 훗날 진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한 번도 힘을 쓰지 못했다.
위나라 혜왕은 진나라의 위협에 끝없이 시달리면서 과거 공손좌의 말대로 상앙을 등용하지 않은 것과 죽이지 못한 것을 죽는 날까지 후회했다.
신법 추진으로 진나라가 패권국의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상앙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이후 총리격인 대량조(大良造)에 올라 국정 전반을 관장하면서 효공과 더불어 사실상 공동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상앙의 버팀목과도 같았던 효공이 기원전 338년 45세의 한창나이에 병으로 죽고, 효혜왕(孝惠王)이 즉위하면서 상앙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효혜왕은 과거 상앙에게 처벌받고 증오감에 이를 갈았던 그 태자였기 때문이다.
하루는 조량(趙良)이란 인물이 상앙을 찾아와 몸을 보전하려면 지위를 던지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으나, 상앙은 효혜왕이 모든 신하의 우두머리로 있는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머지않아 효혜왕은 과거 상앙에게 핍박받았던 공자 건을 포함한 반대 세력을 앞세워 상앙을 탄핵하게 한 후 체포령을 내렸다. 상앙은 필사적으로 진나라를 탈출하여 위나라를 거쳐 정(鄭)나라에 이르렀으나, 그곳 한 고을에서 진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분이 풀리지 않은 효혜왕은 상앙의 시체를 함양으로 옮겨 저잣거리에서 다시 사지를 찢은 후 시신을 잘게 토막 내어 여러 지방에 나누어 보내고, 그의 일가친척들도 남김없이 색출하여 모조리 도륙했다.
우리 역사에도 권력자에 빌붙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힘의 원천이 사라지자 한순간에 몰락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윤원형(尹元衡)과 이기붕(李起鵬)이다.
윤원형은 1503년(연산군 9년) 판돈녕부사를 지낸 윤지임(尹之任)의 아들로 태어났다. 1533년(중종 28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사헌부 지평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공조참판에 올랐다.
중종 후반 조정의 권력은 세자(후일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자 경원대군(慶原大君:후일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小尹)’이 상호 대립하는 형국을 이루었다.
두 정파의 팽팽하던 대립은 인종(仁宗)이 즉위하면서 대윤의 득세로 이어졌고, 힘을 잃은 윤원형은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윤원형이 존재감을 거의 잃어갈 무렵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明宗)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명종의 어머니이자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윤원형은 정3품 예조참의로 즉시 복귀되었고, 대윤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보복(을사사화)이 단행되면서 윤원형의 천하가 시작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때로부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20년 동안 조선은 그야말로 윤원형의 세상이었다.
문정왕후의 절대적 비호 속에 그의 벼슬은 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권세는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명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문정왕후의 막후정치는 여전하여 명종은 임금의 권위를 세우지 못하고, 자기 정치도 할 수 없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종종 주상에게 “내가 아니면 네가 어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호통을 치고 꾸짖어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윤원형은 무슨 일을 도모할 때면 항시 문정왕후를 내세워 명종이 거부할 수 없게 하였고, 그럴 때마다 윤원형에 대한 명종의 증오심은 깊어갔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죽어지냈던 신하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윤원형을 탄핵하였고, 명종은 기다렸다는 듯 윤원형을 파직하고 가산을 몰수한 후 황해도 강음의 외진 곳으로 귀양보냈다.
윤원형은 모든 권세와 재산을 잃고, 궁벽한 유배지에서 행여 조정에서 자신에게 사약을 내릴까 전전긍긍하며 죽음의 공포 속에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하루는 하인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금부도사가 오는 것 같다고 윤원형의 애첩인 정난정(鄭蘭貞)에게 말했는데, 정난정은 붙잡혀 고문당하는 것이 두려워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윤원형 역시 정난정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다 독약을 마시고 함께 자살했다.
제1공화국의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은 윤원형처럼 권력자와 혈연관계는 아니었으나, 권력자에 아부하여 이인자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권력의 배경이 사라지자 그 즉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 인물이다.
이기붕은 1896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7대손으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李會正)의 증손이다. 조부는 20세에 사망하고 아버지도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밥 굶기를 예사로 하였다.
1915년 서울의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가정 형편상 중퇴한 후 선교사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집안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식당 종업원과 공장 노동자를 전전하면서 아이오와 주립 데이버 대학을 간신히 졸업했으며, 귀국 후에도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종로 국일관의 지배인, 다방 경영, 광산 운영 등 여러 일에 손을 댔으나,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저 그랬던 그의 인생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은 광복 후 이승만(李承晩)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미국 유학생 출신이었던 그의 아내 박마리아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현란한 사교술로 이승만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사로잡았고, 그런 인맥을 바탕으로 남편을 이승만의 비서로 만들면서 바야흐로 이기붕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서울특별시장・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하며 정계의 실력자로 떠오른 이기붕은 자식이 없었던 이승만의 양자로 자기 아들 이강석(李康石)을 입적시키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1공화국의 이인자가 되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이기붕도 한때 실패를 맛보았는데, 그것은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장면(張勉)에게 밀려 낙선한 것이다.
절치부심하던 이기붕은 자신이 부통령 후보로 나선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당선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다.
그가 이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에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趙炳玉)이 선거를 목전에 두고 급사하여 이승만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데다 자신이 부통령이 되면 86세의 고령인 이승만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기붕은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하에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에게 지시하여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행정구역 단위로 공무원친목회를 조직하여 관권선거를 위한 사전 준비를 마친 후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 결과 이기붕은 장면을 압도적으로 꺾고 그토록 바랐던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백주에 공공연히 자행된 대규모 부정선거는 당연하게도 국민적 저항을 불렀다.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이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필두로 4월 19일에는 일반 시민까지 가세하였다.
이승만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엄포를 놓았으나, 시민들의 저항은 오히려 거세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선언하며 한발 물러섰으나, 성난 군중은 이기붕의 서대문 자택으로 밀려들었고, 겁에 질린 이기붕은 가족을 이끌고 자택에서 포천에 있는 6군단 사령부로, 다시 자택으로, 다시 6군단 사령부로, 다시 경무대 별관으로 전전하며 도주 행각을 벌였다.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지 이틀 후인 4월 28일 새벽 5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육군 소위였던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피신 중이던 가족 모두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것이다.
이승만이라는 권력자에 기대어 온갖 영화를 누리며 대통령까지 꿈꾸었던 이기붕의 헛된 야망은 이승만의 몰락과 더불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강한 타국에 의존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 자국보다 강한 무력을 지닌 타국과 연합하여 전쟁을 벌일 경우 패한다면 당연히 몰락할 것이고, 이기더라도 승전의 이익은 타국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타국의 무력을 빌리려면 먼저 그 나라를 압도할 힘부터 가져야 한다.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한 채 열강의 힘에 의존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어리석은 군주가 있었다. 오백 년 왕업을 섬나라에 넘겨준 고종(高宗)이다.
고종은 무너져 내리는 나라의 무력한 군주였지만, 나름 영민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외교를 통해 강대국들을 적절히 이용하면 힘의 균형을 통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독립국의 왕 노릇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대외 상황은 고종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5월 28일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트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일본해군에게 괴멸되면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그해 7월 육군 장관 태프트를 일본에 특사로 파견하여 가쓰라 총리와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합의각서를 작성하였다.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그것이다.
밀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고종의 생각이 얼마나 아둔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는다.
둘째, 극동의 평화 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동맹 관계를 확보한다.
셋째,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
밀약 과정에서 가쓰라는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대한제국의 줄타기 외교였음을 강조하고, 또 다른 전쟁의 방지를 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나아가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태프트 특사가 동의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승인하면서 조선은 이때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어 일본은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 동맹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그해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주변 사정이 이러함에도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못한 채 외교를 통한 영세중립국을 추진하던 고종은 헐버트와 알렌을 차례로 미국에 파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무효를 주장하고, 일본에 대해 압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과 밀약을 맺은 미국이 호응할 리 없었다.
미국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한 고종은 세계 각국에 일본의 무도한 침탈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호소하고,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국제법 질서를 위배한 것임을 호소하였으나,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한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1907년 7월 4일 일본의 하야시 다다스 외무대신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한국 황제 밀사의 헤이그에서의 행동 내탐에 관한 건’이라는 전문에서 “3명의 한국인은 각국 외무대신과 각국 위원을 방문했으나 아무도 상대하지 않음”이라고 전했다.
타국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 했던 고종의 부단한 시도는 결국 물거품이 되었고,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망해가는 나라를 구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과정에서도 자기 무력은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반도와 프랑스의 국권 회복 과정을 살펴보면 자기 무력의 규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머나먼 타국에서 거친 바람을 안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가던 임시정부가 해방 직전 작성했던 광복군 명단은 339명으로 알려져 있다.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가 추진했던 광복군의 국내 진공이 개시되기도 전에 일본이 서둘러 항복하자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광복군의 국내 진공이 실제 이루어졌다면 과연 김구 주석의 생각대로 임시정부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을까?
해방 후 광복군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무장을 해제당한 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그마저도 1946년 6월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나라는 외세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이에 반해 드골이 이끌었던 임시정부의 자유 프랑스군은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국내 진공을 개시하여 주도적으로 파리를 해방하고, 전승국의 지위를 얻어 독일의 영토 분할에도 참여했으며, 나치에 협력한 매국노를 철저히 색출하여 제거하는 등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다.
똑같이 외세에 의해 망국을 맞았고, 비슷한 세력에 의해 국권을 회복한 두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상반된 해방 정국을 맞게 되었을까?
프랑스는 국내에 10만 명에 이르는 자생 저항단체인 레지스탕스가 있었던 반면, 한반도 국내에는 무력 단체가 전무 했고, 프랑스 망명 정부의 자유 프랑스군 규모는 2개 사단이었지만, 대한민국 망명 정부의 광복군은 1개 중대 규모에 불과했다.
만일 한반도에도 레지스탕스와 유사한 자생적 항일 무력 단체가 존재했고, 광복군의 규모가 사단 병력만 되었더라도 미군정 당국이 광복군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라 또한 그리 쉽게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가 자기 무력을 갖지 못하면 주변 강국에 눌려 주권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하물며 한 개인이 타인의 힘에 의존해 살고 있다면 비만 오면 범람하는 물가에 집을 짓고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