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불행을 동반한다

by 노을 강변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영원히 번창할 것 같던 사업가가 하루아침에 파산하여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거나, 뭇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명망가가 오명을 뒤집어쓰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실패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부적 요인보다는 ‘욕망’이라는 내부적 요인을 통제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2019년 11월 10일 ‘볼리비아의 체 게바라’로 불리며 남미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로 평가받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이 14년간 이어 오던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길에 오른 것은 권력이라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랄레스는 1959년 볼리비아 원주민인 아이마라족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양치기・벽돌공장 인부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으나, 타고난 리더의 기질이 있어 20대에 코카 재배 농장에서 함께 일하던 원주민 단체를 이끄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자신에게 남다른 정치 감각이 잠재해 있음을 간파한 그는 1995년 사회주의 정당 ‘MAS’를 창당하여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모랄레스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과격한 정책을 표방한 탓에 집권 세력의 집중적 견제를 받아 국외 추방 등 정치적 탄압을 당하기도 했으나, 고질적인 경제난과 격심한 빈부 격차는 모랄레스를 볼리비아의 희망으로 만들었고, 볼리비아 국민은 2005년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안정적인 경제성장과 서민의 삶을 개선하여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받았던 모랄레스가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의 손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유는 단 한 가지, 장기 집권의 욕망 때문이었다.


볼리비아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모랄레스는 자신의 임기 중인 2007년 11월 개헌을 통해 1차에 한하여 대통령 연임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는 첫 번째 임기가 헌법 개정 이전에 시작된 것이므로 개정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워 2009년 대선에 이어 2014년 대선에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여기에서 그쳤더라도 그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국민의 칭송을 받았을 텐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그를 괴물로 만들어 갔다.


3연임에 만족하지 않고 4연임을 꿈꾸던 그가 택한 방법은 헌법을 또다시 개정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헌법 재개정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홍보한 보람도 없이 연임 허용 횟수를 1차에서 2차로 늘리는 헌법 개정안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고심하던 모랄레스는 연임을 제한하는 헌법 규정 자체를 없애는 것에서 방법을 찾았고, 여당 편향의 헌법재판소가 그의 뜻에 따라 연임 제한 규정의 위헌을 결정하면서 모랄레스는 어떤 제약도 없이 2019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


볼리비아 국민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편법을 일삼는 지도자에게 실망하기 시작했고, 민심의 이반을 감지한 모랄레스는 부정선거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부정선거는 개표 조작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전모는 다음과 같았다.


2019년 10월 20일 대선 투표 개표가 83% 진행되던 중 갑자기 개표가 중단되었다.

이때까지 개표 결과는 모랄레스가 45.28%로 선두였고, 2위와의 격차는 7%로 결선투표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볼리비아 선거법은 40%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2위 후보와 10% 이상 차이가 나면 당선되고, 그 미만이면 결선투표를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 중단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개표를 중단한 지 24시간 후 모랄레스가 47%의 득표로 당선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야당은 선거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미국과 캐나다 등 아메리카 대륙 35개국이 속한 ‘미주기구(OAS)’에서도 볼리비아의 투표시스템에 명백한 조작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야권을 중심으로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고, 국영방송사가 시위대에 점거되는 등 사태가 격화하면서 시위를 막던 경찰과 군인들은 물론 대통령궁 경호관까지 대통령 불복종에 나서자 모랄레스 대통령은 야권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한발 물러서며 재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완전한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멈추지 않았고, 군 최고사령관마저 사퇴를 권유하자 상황 반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모랄레스는 결국 사퇴를 선언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img.jpg 정권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가 성난 민심에 부딪혀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에 의해 대통령궁에서 쫓겨난 모랄레스는 도로변에서 노숙하며 지내다 멕시코로 망명했다.

정권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가 성난 민심에 부딪혀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에 의해 대통령궁에서 쫓겨난 모랄레스는 도로변에서 노숙하며 지내다 멕시코로 망명했다.


모랄레스가 3연임에서만 그쳤더라도 죽는 날까지 우러름을 받으며 명예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더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욕심이 지난날 그의 영광을 모두 훼손시키고, 자신의 나라에서도 살 수 없는 처량한 망명객이 되게 하였다.




하늘을 찌르던 권세를 한순간에 모두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한 조선 중기 홍국영(洪國榮)의 짧은 흥망성쇠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주제로 담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홍국영은 선조(宣祖)의 사위였던 홍주원(洪柱元)의 6대손으로 1748년(영조 24년) 판돈녕부사를 지낸 홍낙춘(洪樂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용모가 수려하고 시문과 언변에 능했다고 하며,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잡기에 몰두하고 술 마시기를 즐겼는데, 술에 취하면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며 호언장담하곤 했다.

1771년(영조 47년) 2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 홍국영은 세자시강원 근무 시절 세손(후일 정조)과 인연을 맺었다.


홍국영은 타고난 사교성으로 금세 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한중록(閑中錄)』에서 “요 작은 놈(홍국영)이 간사한 꾀를 내어 동궁(정조)께 곧게 충고하는 체하나, 실은 다 듣기 좋은 말이라. 한 번 국영이 들어오자 외부 사정에 대해 여쭙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국영은 자신의 미래가 세손에게 달려 있음을 직감하고, 영조 말기 노론 벽파의 횡포로부터 세손을 보호하는 동시에 온몸을 다하여 충성함으로써 세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즉위 이후에도 자신을 시해하려는 자객이 궐내로 난입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홍국영이 자객을 추포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다.


후일 왕위에 오른 정조는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라며 홍국영을 치하하였고, 왕의 심기를 잘 살폈던 좌의정 김종수(金鍾秀)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며 왕의 신뢰에 동조했다.


실제 정조는 즉위한 지 며칠 만에 홍국영을 도승지(都承旨)로 임명하고, 숙위소(宿衛所)의 대장을 겸임케 하는 등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임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img.png MBC드라마 <이산>에서 한상진이 연기한 홍국영

왕의 절대 신임을 바탕으로 홍국영은 단번에 조선 최고의 권세가로 올라섰고, 조정의 모든 신료는 그의 말에 이의를 달지 못했으며, 팔도 수령들 또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면서 홍국영은 자신과 왕이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면 몸을 낮추어 자신을 지켜야 함에도 홍국영은 오히려 자신의 영향력을 높여가는 반대의 길로 나아갔다.


국정의 주요 사안을 왕에게 보고하기 전에 자신을 거치도록 하는 등 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각종 구실을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 신료들을 숙청하는 등 권한을 남용했으며, 오만함도 극에 이르러 나이 많은 신료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것은 보통이고, 높은 평상에서 맨발로 다리를 뻗고 앉아 재상들을 맞이하는 일도 있었다.


홍국영의 세도가 여기에서만 그쳤어도 정조의 후광으로 별 탈 없이 영화를 누렸을 것인데, 왕의 후계에까지 관여하면서 파멸을 자초하였다.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홍씨)으로 들인 후 왕자를 생산시켜 정조의 뒤를 잇고자 계획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원빈홍씨(元嬪洪氏)가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홍씨의 양자로 삼아 정조의 후계로 삼으려 하는 등 권력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자신의 누이를 독살했다고 강변하며 독살 증거를 찾는다는 이유로 궁궐 나인을 포함한 무고한 사람들을 대거 문초하면서 많은 사람의 원망을 샀다.


정조는 홍국영을 끝내 보호하고 싶었으나, 국정 전횡의 정도가 도를 넘어서자 참을 수 없었던지 1779년(정조 3년) 9월 26일 홍국영에게 모든 관직에서 떠날 것을 명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홍국영 퇴진 명령에 반신반의하던 신하들은 정조의 본심을 알고 난 후에야 앞다투어 홍국영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을 두둔하는 데 앞장섰던 좌의정 김종수조차 홍국영 탄핵에 동참했다.


즉시 도성을 떠나라는 정조의 명에 따라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강원도 횡성을 거쳐 강릉에 유배된 홍국영은 근처 바닷가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하다 33세의 이른 나이에 병을 얻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소동파(蘇東坡)로 널리 알려진 소식(蘇軾)의 시 중 ‘가계야치(家鷄野雉)’라는 말이 있다.




집의 닭을 싫어하고 들의 꿩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제 것보다 남의 것에 더 관심을 보이는 옳지 못한 근성을 질타하는 말이다.


충분히 행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행복인 줄 모르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벨기에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는 『파랑새』의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파랑새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은 얻으려고 애쓸수록 멀어진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나무꾼의 자녀인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의 꿈에 요술 할머니가 나타나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어린 남매는 그길로 파랑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추억의 나라, 밤의 나라, 미래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파랑새는 없었고, 지쳐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기 집 새장에 있더라는 이야기다.


작가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며, 일상에서 흔히 누리는 사소한 것에도 행복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영국의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을 발견한다”고 하여 『파랑새』와 유사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장자(莊子)』에 ‘수주탄작(隨珠彈雀)’이라는 말이 있다. 구슬로 참새를 쏜다는 뜻으로 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귀한 것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수주(隨珠)’는 ‘수후(隨侯)의 구슬’을 의미하며, 수(隨)나라 제후가 큰 상처를 입은 뱀을 구해 준 보답으로 받은 야광주를 말한다.


‘화씨지벽(和氏之璧)’과 함께 ‘수주화벽(隨珠和璧)’이라 칭해지는 이 보물에 관해 장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노(魯)나라 군주가 안합(顔闔)이라는 현인을 얻기 위해 사신에게 정중히 모셔오라 명했다. 사신이 예물을 싣고 안합의 집에 가보니, 안합은 누추한 집에서 삼베옷을 입고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있었다.


사신이 예물을 바치며 임금의 명을 전하자 안합은 임금이 찾는 사람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르니, 돌아가서 다시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사신이 돌아가 확인한 후 다시 안합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장자는 이 고사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평을 달았다.


“세속의 군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삶을 버리면서까지 사물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이 수후의 구슬을 천 길 높이 나는 참새를 쏘는 데 사용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을 것이다. 왜냐면 귀중한 것을 사용하여 하찮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이 어찌 수후의 구슬만 못하겠는가.”


한비자(韓非子)는 “대부분 사람은 크게는 제후가 되고 작게는 천금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소유하길 바라니, 그 마음에서 근심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근심의 근원을 욕심으로 보았고,


맹자(孟子)는 “욕심을 적게 갖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으니, 욕심이 적다면 비록 선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보존되지 못하는 것은 적을 것이요. 욕심이 많다면 비록 선한 마음이 보존되었어도 보존되는 것은 적을 것이다”라고 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몸을 망치는 원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의 저자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부자와 빈자의 기준을 “가진 것보다 덜 원하면 부자요, 가진 것보다 더 원하면 빈자”라고 했다. 욕심과 행복의 관계를 이처럼 명확하게 정의해 놓은 게 없다.


곰곰이 돌아보라. 지금껏 자신보다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을 쳐다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한 적은 있어도,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현재의 삶에 행복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만년에 이르러 사람들이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하나같이 후회하는 것이 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일상들이 진정 행복이었음을 당시에는 몰랐다는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대개가 필수적이지만, 아직 가지지 않은 것은 대개가 선택적이다. 전자를 잃으면 삶의 기반이 무너지지만, 후자를 얻으면 행복의 정도가 다소 나아질 뿐이다.


가지지 않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을 통제하고,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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