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일본 도쿄의 한 지방법원은 80세에 가까운 구마자와 히데아키 전 농림성 차관에게 아들을 살해한 죄로 징역 6년 형을 선고했다.
40대 중반인 히데아키씨의 아들은 도쿄에서 오랫동안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부모 집에 얹혀살았는데, 이들 부부는 그런 아들에게 종종 질책성 야단을 치곤 했다.
처음에는 자신도 미안했던지 참았는데, 언제부턴가 야단을 치면 아들이 노부부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그런 일이 잦아지자 아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결국 아들을 살해한 것이다.
해를 넘긴 2020년 9월 이탈리아에서는 한 청년이 부모를 상대로 평생 부양을 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가 5년의 재판 끝에 패소했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시간제 음악 강사로 일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아들이 연봉 1만 8000유로(2,500만 원 상당)의 수입으로는 생활이 힘들다면서 부모를 상대로 부양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소송 이유는 “본인이 원치 않는 출생을 하였으니, 낳은 것에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1심 법원은 매달 300유로(약 40만 원), 2심법원에서는 매달 200유로(약 27만 원)를 지급하라며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최종심인 대법원은 부모에게 성인 자녀의 재정 상태를 평생 책임질 의무가 없다며 하급 판결을 뒤집고 부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을 맡은 마리아 지안콜라 재판장은 “부모의 지원은 무한정이지 않으며, 성인이 된 자식은 경제적 독립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필자 주변에도 무능력한 자녀 때문에 노후가 막막해진 지인 한 분이 있다.
공무원이었던 그분은 퇴직하면서 연금 대신 일시금을 받는 흔치 않은 선택을 하였는데, 이는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 마땅한 직업 없이 지내던 장성한 자식이 사업을 해보겠다고 애원했기 때문이었다.
잦은 인사이동에 어릴 때부터 수시로 전학을 시켰고, 박봉에 잘 먹이고 입히지도 못했으며, 남들처럼 좋은 학원에도 보내지 못해 대학도 포기시켰던 지난 일들이 상처처럼 가슴에 남아 퇴직금 모두를 아들에게 내주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아들의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오래지 않아 부도를 냈고, 아들의 빚 청산을 위해 살던 집마저 전세로 내주고 월세방으로 옮겨야 했으며,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생계를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녀에 대한 과보호는 우리나라가 특히 심한 편이지만, 서구권 국가에서도 자녀의 과보호는 별 차이가 없어서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 국가의 경우 군대를 지원하는 젊은이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부모에게 의존적인 밀레니얼 세대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과보호 속에 자라면서 자립 의지를 키우지 못해 엄격한 병영 생활이 요구되는 군대에 좀처럼 지원하지 않고, 지원했더라도 신병 선발 과정에서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청년 실업률이 40%에 달하는 이탈리아에서도 모병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장기간 이어져 이탈리아 군인의 평균 연령은 1990년 이전에는 25세 정도였으나, 현재는 38세가 되었다고 하며, 독일도 2011년 징병제 폐지 이후 신병 조달이 어려워 외국인을 독일군으로 선발하는 방안을 고심 중이라 한다.
최근 일본 통계에 따르면 일본 중년의 ‘니트족’은 약 12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일본만큼 심각하게 니트족이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가장 증가 속도가 빠른 것은 노부모에 얹혀사는 40대 니트족이라고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년 니트족의 가파른 증가세는 청년 니트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자립심을 키워주는 대신 모든 것을 관리해 주며 화초처럼 자녀를 키운 부모가 뒤늦게 그릇된 양육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자녀의 과보호도 문제지만, 비용 면에서 따져보면 자녀 양육이 부모의 삶의 질을 얼마나 후퇴시키는지 실감할 수 있다.
2017년 NH투자증권 「100세 시대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자녀 1명당 대학 졸업 때까지 드는 양육비가 3억 9670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억 원을 적금으로 모은다고 가정하면 매월 100만 원씩 33년이 소요되고, 30대 초반에 출산한다고 가정하면 60대 중반까지 매월 그 정도의 비용을 투입해야 하며, 만약 두 명의 자녀를 양육한다고 가정하면 경제적 능력이 다할 때까지 매월 200만 원 이상을 자녀 양육으로만 지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자녀의 결혼 비용이나 주택 마련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손주까지 돌보는 불행한(?) 사태까지는 상상하지 않더라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소요될 것이다.
노후 파산은 젊은 시절의 불성실함이 가져다주는 뼈아픈 후과(後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녀 양육에 지나치게 매진해도 찾아올 수 있는 불행 중 하나이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면 자식을 망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데, 실제 자식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식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군주가 있었다.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이기도 한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역사가들은 로마의 전성기를 ‘5현제 시대’라고 말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우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로마의 제12대부터 제16대까지의 다섯 황제는 연이어 선정을 펼치며 각처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고, 평화와 번영을 온 나라에 흘러넘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의 권력 승계 방식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독특했다. 황제가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 성품이 훌륭한 사람을 양자나 사위로 삼아 제왕 교육을 한 후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한 것이다.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는 날까지 깊은 사색과 자기성찰에 철저했고, 탁월하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황제였지만, 골육의 정은 어쩔 수 없었던지 이전의 훌륭한 후계 방식을 포기하고, 로마제국 최악의 황제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부실한 아들 콤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18세에 황제가 된 콤모두스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치를 일삼으며 검투사 복장으로 경기장에서 노예나 맹수들과 격투를 벌였다.
향락에도 뒤지지 않아 속주에서 들여온 3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음행을 일삼는 등 도무지 황제다운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번은 자신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콤모두스는 어린 시절부터 이성적이거나 학문적인 것은 혐오했고, 품위 있는 시대의 영향력 아래서 세심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의 거칠고 야수 같은 마음에는 학문의 흔적이 조금도 없었으며,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들, 즉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 사냥 같은 대중적인 오락만을 즐겼다”고 기록했다.
로마시민들은 국정을 내팽개치고 기행을 일삼는 미치광이 황제에게 수치심을 느꼈고, 측근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황제의 잔혹함에 몸을 떨었다. 그렇게 폭정을 이어가던 콤모두스는 결국 자신의 레슬링 파트너인 측근에 의해 욕조에서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핏줄에 얽매여 우둔한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인해 로마제국의 영광시대는 종말을 맞고, 이후 반세기에 걸쳐 이십여 명의 군인들이 연이어 황제에 오르는 끝도 없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게 되면서 로마는 서서히 멸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잠부론(潛夫論)』에 ‘포유다즉생간병(哺乳多則生癎病)’이라는 말이 있다.
젖을 과하게 먹이면 경풍(驚風)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자녀에 대한 자애심이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됨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정성을 기울인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자식에 대한 정성만큼은 지극할수록 그들의 자립 능력을 빼앗아 세상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나 보살핌이 원인이 되어 부모가 고통받는 경우는 흔한 일이지만, 그 반대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여러 자식을 죽인 희대의 잔인한 어머니가 있었다. 여성으로 중국 최초의 황제에 오른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측천무후의 본래 이름은 무조(武曌)로 624년 하급 무사인 무사확(武士彠)의 차녀로 태어났다. 무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남자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자태가 아름다웠다.
637년 14세에 입궐하여 후궁으로 지내던 중 당태종(唐太宗)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었으나, 주변 궁녀들의 시기가 많아 몸을 사리며 죽은 듯 지냈다.
하루는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몇 차례나 나타나는 기상 이변이 있어 태종이 무슨 조짐인지 알아보라 했더니,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사령이 당(唐) 왕조 3대 이후에 무(武)씨 성을 가진 여자 군주가 출현할 징조라는 해석이 나왔다.
당연히 궁중에 무씨 성을 가진 여자들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무조에게도 혐의가 씌워졌으나, 몸을 낮춘 덕에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런 와중에도 태자 이치(李治:후일 고종)와 잠자리를 함으로써 후일을 대비했다.
시간이 흘러 당태종이 사망하자 자녀가 없는 비빈들을 절에 보내는 관례에 따라 무조도 감업사라는 절로 쫓겨나 평생 비구니로 살아갈 처지에 놓였으나,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던 고종(高宗)의 부름을 받아 다시 입궐할 수 있었다.
궁으로 돌아온 무조는 황후의 비위를 맞추고,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여러 자녀를 낳아 황후 다음가는 소의(昭儀)에 올랐으나, 그녀가 바라는 자리는 황후였다.
기회를 노리던 중 고종의 딸을 낳았는데, 황후가 무조의 딸을 보기 위해 그녀의 처소를 다녀간 직후 자기 손으로 딸을 목 졸라 죽이고는 황후가 죽였다고 고종에게 무고하였다.
황후는 죄 없음을 호소했으나, 황제의 자식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지 못했고, 결국 황후의 자리는 무조에게 돌아갔다. 황후의 꿈을 이룬 무조는 더 나아가 황제를 꿈꾸었다.
이후 황제에 이르기 위한 그녀의 정치적 여정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먼저 황태자였던 이충(李忠)을 폐위시킨 후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독살시켜 죽이고, 자신의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다.
고종이 죽은 후 이현이 4대 황제(중종)에 올랐으나, 다시 폐위시키고, 자신의 4남 이단(李旦)을 5대 황제(예종)로 삼았다가 또다시 폐위시킨 후 드디어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여황제가 탄생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식들을 죽인 그녀의 악행은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어렵다.
측천무후처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지 않듯,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자신과 자식의 유전적 연결고리를 불가분의 숙명처럼 여기는 착각에서 양육의 지나침이 시작되고,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식은 그만큼 무기력해진다. 잘되든 못되든 자식의 삶은 자식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