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든 국가든 가릴 것 없이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좋은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다. 좋은 명분은 구성원의 의욕을 북돋고,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목표를 향한 여정에 추동력을 부여한다.
범죄심리학에 ‘중화기술이론(中和技術理論)’이라는 것이 있다. 사이크스와 맛차라는 범죄학자가 주장한 이론으로 비행 청소년들이 자신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는 다섯 가지 유형의 기술을 말한다.
첫째 ‘책임의 부정’이다. 비행을 저질렀지만, 자신의 비행은 가난한 가족 부양을 위한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따위이다.
둘째 ‘가해의 부정’이다. 방화했지만, 보험회사가 보상해 줄 것이니, 자신은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따위이다.
셋째 ‘피해자의 부정’이다. 상점의 물건을 훔쳤지만, 주인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도난당해도 마땅하다고 여기는 따위이다.
넷째 ‘비난자의 비난’이다. 경찰이나 판사들은 부패한 공무원이므로 그들은 자신을 벌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따위이다.
다섯째 ‘고도의 충성심에의 호소’이다. 시위과정에서 화염병을 던졌지만, 민주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따위이다.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려고 이와 같은 명분을 만들어내는데, 하물며 어떤 과업을 수행하면서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지지 못한다면 넝마를 입고 미인대회에 출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상 최고의 명분을 내걸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고, 사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명분의 위대함으로 많은 정치인이 닮고자 애쓰는 인물이 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다.
북부 출신이자 노예해방론자인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일곱 개의 남부 주들이 ‘남부연합’을 형성한 후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면서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간에 걸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링컨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연방제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 노예해방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링컨이 노예해방을 전격적으로 선언한 것도 순수 인도적 정신의 발로라기보다는 노예에 의존하던 남부의 전통적 경제체제에 타격을 가하여 종국적으로 전쟁을 북부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게다가 링컨의 노예제 폐지선언은 세계 최초도 아니었고, 그 선언이 전 세계의 노예제 폐지를 촉발한 것도 아니었다. 덴마크는 1803년, 프랑스는 1818년, 영국은 1833년에 이미 노예제를 폐지하였고, 그나마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들도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추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노예제에 관한 한 링컨은 소신 없는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링컨은 1858년 7월 시카고 연설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선언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가, 불과 두 달 뒤 일리노이주 찰스턴의 연설에서는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 흑인에게 선거권이나 배심원의 권한을 주는 것, 그들이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백인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머무는 한 그들이 우리처럼 살 수 없으므로 상층과 하층 계급은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상층의 지위는 백인들에게 할당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게다가 노예제도가 이미 존재하는 주의 노예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며,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도 “나의 최고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링컨은 철저한 노예해방론자가 아니라, 철저한 연방주의자였다.
어떤 면에서 링컨은 사분오열된 미국을 통일로 이끈 인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일으킨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내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참전 군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6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다년간의 전쟁으로 국토를 피폐하게 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음에도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이념 아래 ‘노예제 폐지’라는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성스러운 명분을 내세운 덕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임 중 암살 당한 지도자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역사가들 특유의 아량 덕에 그의 실정은 모두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노예해방을 이루어낸 위대한 대통령으로만 기억되고 있으며, 게다가 세계 최강국을 조국으로 둔 덕에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이 되었다.
오늘날 장기판에서도 볼 수 있는 초나라와 한나라의 천하 쟁패전에서 애초 유방의 한나라 세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멋진 명분을 내세운 덕에 천하의 민심을 얻어 일세의 영웅 항우를 패퇴시키고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유방이 변방의 파촉을 벗어나 겨우 중원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한 늙은이가 유방을 찾아와 말했다.
“신이 듣기로 ‘덕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順德者昌 逆德者亡)’ 했습니다. 또 ‘명분 없이 군사를 내면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다(出兵無名 事故不成)’ 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곧 덕을 짚고 일어나고 대의명분을 앞세운 군사가 싸움에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항우는 무도하여 함부로 그 임금인 의제(義帝)를 시해했으니 이는 천하의 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어짊은 용맹을 부릴 일이 없고, 의로움은 힘을 쓸 일이 없다(仁不以勇 義不以力). 하는 바, 대왕께서는 엄숙하게 의제의 장례를 치르신 다음 삼군(三軍)에게 상복을 입히시고 크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그 뒤 천하 제후에게 의제께서 항우에게 시해당했음을 알리고, 그들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항우를 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덕을 우러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항우를 깨뜨릴 계책은 먼저 민심을 얻는 데 있음을 깨닫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의명분을 내세울 필요가 있음을 직감했다.
유방은 그날로 의제를 위해 발상거애(發喪擧哀)하고 크게 장례를 치르게 했는데, 유방 자신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목 놓아 울어 슬픔과 충심이 드러나게 했으며, 사흘 동안 의제의 빈소를 지키며 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후 유방은 천하의 제후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돌렸다. “의제는 천하가 함께 천자로 올려세우고 만백성이 섬기던 분이셨다. 그런데 이제 항우가 의제를 강남으로 쫓아냈다가 시해하였으니, 실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과인이 친히 의제를 위해 발상하거니와, 모든 제후도 흰 상복을 입고 의제의 죽음을 슬퍼할 일이다. 또 과인은 늦었으나마 관중의 모든 병마를 일으켜 남으로 내려가려 한다. 천하 모든 제후와 왕들도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과인과 같은 깃발 아래 모이기 바라노라. 과인과 함께 서초로 달려가 의제를 시해한 항우를 쳐 없애고 천하의 대의를 바로 세우도록 하자!”
이 격문을 받아본 많은 제후와 왕들이 의분을 일으켜 분분히 유방의 기치 아래 모여드니 이로써 유방은 역적을 몰아낼 충의지사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의 군대는 의군이 되었으며, 군세는 불과 수만에서 순식간에 50만 대군으로 불어날 수 있었다.
이후 항우는 역적에 버금가는 불의한 세력으로 인식되면서 곳곳에서 저항에 직면하며 군세가 줄어들었지만, 명분에서 우위를 확보한 유방은 가는 곳마다 우군을 확보하면서 군세가 늘어갔고,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G2의 한 축으로 현재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공산당 정권도 대의명분을 잘 세운 덕에 국민당과의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절대적 약세를 우세로 역전시키고 거대한 대륙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초기 중국공산당의 무장 세력인 홍군(紅軍)은 중국 국민당 군대의 압도적 전력에 밀려 패퇴를 거듭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 홍군이 국민당 군대를 조그만 섬으로 내몰고 대륙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아닌 명분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이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지만,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밖을 막으려면 안을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라는 정책을 고집하면서 목전의 일본군은 공격하지 않고, 후방의 홍군 토벌에만 매진하였다.
전력상 열세에 놓여있던 공산당 지도부는 국민당과 정면 대결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였다. 즉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대국민 홍보에 나서는 한편, 내전을 중지하고 힘을 합쳐 항일투쟁에 나서자고 국민당에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산당이 수세를 타개하기 위해 술책을 부리는 것이라고 보고, 홍군 토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국민당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홍군에게 극적인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 유명한 ‘시안사건(西安事件)’이었다.
1936년 12월 당시 동북군 사령관이었던 장쉐량(張學良)은 홍군과 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동북군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 통일전선 구축 등을 골자로 하는 8개 항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하여 항일투쟁에 나서자는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홍군은 합법적 지위를 얻음과 동시에 중국 국민으로부터 ‘정의로운 군대’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당시 중국 여론은 반공(反共)보다 반일(反日)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런 흐름을 정확히 간파하고, 당파를 초월한 일치단결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최고의 명분을 선점했던 반면, 장제스는 사적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의 적은 그대로 둔 채 동족을 공격하는 매국노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본격적인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명분 싸움에서 밀린 장제스는 미국의 전폭적 지원과 전력상 우위에도 불구하고 돌아선 민심을 뒤로한 채 대만을 향해 서둘러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명분의 힘은 참으로 대단해서 부도덕한 행위를 정의롭게 치환하거나 평범한 행위를 성스럽게 격상하기도 한다.
본래는 특정 사회계층이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결과에 불과했지만, ‘신체의 자유’라는 위대한 명분을 내세운 덕에 오늘날 인류 인권사의 기원으로 과대 평가받고 있는 것이 있다. 「마그나카르타」라고 불리는 영국의 「대헌장(大憲章)」이다.
13세기 초 영국 존왕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많은 영토를 잃고, 내치에서도 실정을 거듭하였으며, 교황 이노센트 3세와의 분쟁에서 파문을 당하는 등 왕으로서의 권위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그 기회를 틈타 평소 과세와 군역에 불만이 있던 귀족세력은 교회세력과 동맹하여 존왕에게 모종의 문서를 내밀며 서명을 강요했다.
전문과 63개 조로 구성된 이 문서의 핵심 조항은 “자유인을 재판이나 국법 없이 체포・감금할 수 없다”고 선언한 제39조였는데, 표면적으로 이 조항은 일반 국민의 신체적 자유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봉건귀족들이 자신들의 재산과도 같은 자유인을 국왕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런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대헌장」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근사한 명분의 옷을 입은 덕에 근대 헌법의 기원이 되었고, 영국은 민주주의의 모국(母國)이 되었다.
명분은 주로 어떤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적극적 역할에 봉사하나,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역할에도 종종 동원된다. 미국이 가공할 무기인 원자폭탄을 민간인 밀집 지역에 투하하여 대량 살상의 결과를 초래한 후 내세운 명분이 그랬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을 분수령으로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세계 각처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며 종전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미국은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는 일본의 식민지 주둔군을 공격하는 대신 일본의 심장부인 본토를 공격하여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1945년 4월 일본 서남쪽에 있는 오키나와섬 점령을 시도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던 관계로 일본군은 사활을 걸고 방어전에 나섰고, 해변 대신 섬 내부의 험준한 요새 지대로 미군을 유인하는 진지전 전략을 구사하였다.
전투병력 20만 명을 동원한 미국은 이 작은 섬을 점령하기 위해 한 달 동안 3만 발의 포탄을 퍼부어 상륙에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나, 이후 치열한 전투가 81일간 이어지며 군함 40여 척, 항공기 700여 기, 전차 200여 대를 잃고, 1만 2천여 명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은 전멸될 것을 예감하고, 연합국 측에 최대한 타격을 입혀 강화조약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처절한 전략 아래 악귀처럼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우시지마 중장을 비롯한 4,000명이 집단으로 자결하는 등 일본군 8만 명 전원이 전사하고,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도 징집되어 전사하거나 가족끼리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등 전체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 명이 사망했다.
작은 섬 하나를 점령하는데 많은 미군이 희생되고, 전쟁과 무관한 주민들이 집단 자살하는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미국은 1억 명이 거주하는 일본 본토 점령에 필요한 병력의 규모를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승전방법을 고민하다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3일 후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이로 인해 히로시마에서 7만 명, 나가사키에서 3만 5천 명 정도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피폭 현장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는 경악했고,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민간인 거주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비인도적 살육행위라는 비난이 일었다.
비등하는 국제적 비난에 난감해하던 미국은 “원자폭탄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할 수 있었고,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원폭 투하 사망자의 수백 배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궁색한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수많은 인명을 일방적으로 살상하는 전쟁에서도 명분을 찾으려는 게 상식이지만, 아무런 명분도 없었던 전쟁도 적지 않았다.
특히 ’아편전쟁(阿片戰爭)‘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신사의 나라’로 불리던 영국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근대 이후의 전쟁사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명분 없는 야만적 전쟁이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차와 비단은 당시 영국인들의 생활에 거의 필수적인 것으로 굳어져 있었던 반면, 면제품 등을 포함한 영국의 수출품은 중국인들에게 절실할 정도는 아니라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만성적 적자에 시달렸다.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골몰하던 영국은 비열하게도 아편 밀수출이라는 야비한 방법을 고안해냈고, 영국 정부의 암묵적 승인 속에 수많은 아편이 청나라로 반입되었다.
초기 1천 상자에 불과했던 영국의 아편 밀수출은 아편전쟁 직전 4만 상자까지 증가했는데, 이는 300만 톤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고위 관료나 지주와 같은 지도층에서부터 빈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국인이 아편에 중독되는 계기가 되었고, 하급 관료층 90% 정도가 아편에 중독되어 행정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편의 만연으로 나라가 병들어가자 청나라 조정은 아편 유통을 엄금하고, 흡연이나 매매에 관여하는 자들을 엄히 처벌하였지만, 아편 중독자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게다가 아편 밀수대금으로 막대한 은이 나라 밖으로 유출되면서 은본위제를 기조로 하고 있던 청나라의 재정기반이 흔들렸고, 민생경제 또한 파탄상태에 빠졌다.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 조정은 은의 유출을 막고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해 1839년 아편 강경론자인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광동성으로 급파했다.
광동성에 도착한 임칙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상선에 실려 있던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한 후 모두 불태우는 등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영국은 청나라 당국의 강경조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떤 사전적 외교 교섭도 없이 정예군대를 전격 파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청나라 군대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최신 함대와 신식무기로 무장한 그들에게 300년 전부터 사용하던 낡은 무기로 대적하는 청나라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영국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면서 가는 곳마다 강간・약탈・방화를 일삼았고, 별다른 저항 없이 남경(南京)을 함락했다.
청나라 도광제(道光帝)는 북경(北京)을 향해 밀려드는 영국군의 위력에 압도당하여 협상을 원했고, 영국은 준비된 문서를 내밀었다.
홍콩 할양, 5개 항구 개항, 배상금 지급, 관세자주권 포기 등을 내용으로 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굴욕적 불평등조약(남경조약)이 이렇게 체결되었고, 이 조약은 중국이 형편없는 약체의 나라임을 전 세계에 선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중국은 세계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으며, 여기에 더하여 영국은 조약의 불이행을 구실로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아예 아편 수출을 합법화하는 내용의 조약까지 맺었다.
전쟁의 일방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편전쟁은 영국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적지 않았다.
재선 의원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 승전으로 얻을 이익은 분명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와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다”며 의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아편전쟁을 어떤 명분도 찾을 수 없는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일반적으로 정당화되지만, 명분을 잃으면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더라도 호평받기 어렵다.
마찬가지 이유로 싸움에서 지더라도 명분이 뚜렷하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지만, 명분 없는 싸움은 승리하더라도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전리품조차 장물 취급을 받는다.
명분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누구나 수긍할 좋은 명분을 확보하면 경쟁의 시작점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비슷한 양 진영이 쟁투를 벌일 때 좋은 명분 선점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