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관계의 양 진영이 있다고 가정할 때 각 진영의 일인자는 상대 진영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된다.
상대 진영의 일인자를 제거하면 한순간에 적진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고,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하면 쉽사리 적진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땅에 상륙한 후 오로지 수도 한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 것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주력이 남한산성을 45일 동안 포위한 것도 적국의 일인자인 왕을 사로잡으면 손쉽게 승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서도 정권이 바뀌면 새로운 권력은 지난 정권의 일인자를 대상으로 공(功)보다는 과(過)를 부각하여 공격의 화살을 집중한다.
지난 정권의 상징인 과거 일인자를 폄훼하는 것만으로도 현 정권의 일인자를 정의롭게 포장할 수 있고, 손쉽게 지난 정권의 색깔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권력을 잃어버린 과거 정권의 일인자는 운이 좋으면 비판의 대상에 그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감옥행을 감수해야 한다.
권력을 잃은 과거 일인자의 종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대에서는 일인자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의 왕 4분의 1은 독살로 죽었다는 주장이 있을 만큼 왕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도 많아 왕은 늘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
왕위를 두고 숱한 음모와 살인의 역사가 있었지만,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왕위를 두고 벌어진 극단의 살인극은 일인자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에게는 제번(諸樊)・여제(餘祭)・여매(餘昧)・계찰(季札) 등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수몽은 넷째인 계찰이 인품이 높고 현인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이 극구 사양하여 장남인 제번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제번은 죽으면서 다음 왕위를 둘째인 여제에게 물려주었고, 여제도 죽으면서 셋째인 여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여매 역시 죽으면서 넷째인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이 또다시 사양하여 여매는 자기 아들인 요(僚)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제번의 아들인 광(光)은 원칙 없는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었고, 형제 계승의 원칙이 무너진 마당에 첫째의 아들인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왕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광은 자객 전제(專諸)를 요리사로 변장시키고, 무사들을 지하실에 매복시킨 후 생선요리 대접을 하겠다며 오왕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무장한 군사들을 대동하고 광의 집에 도착한 오왕은 대문에서 연회석까지 군사들을 촘촘하게 늘어서게 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했고, 왕의 호위군은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연회장에 들어갈 때 옷을 갈아입도록 하여 무기 반입을 차단했다.
전제는 궁리 끝에 생선요리의 뱃속에 칼을 숨겼고, 요리를 들고 오왕 가까이 다가가 물고기의 배에서 칼을 꺼내 오왕의 가슴을 찔러 단숨에 살해하였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광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부차(夫差)의 아버지 오왕 합려(闔閭)이고, 이때 사용된 칼이 명검으로 유명한 ‘어장검(魚藏劍)’이다.
일인자의 위태로움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포유류의 경우 대체로 한 마리의 수컷이 일인자가 되어 무리의 전체 암컷을 거느리는데, 이 경우 여타 수컷들은 호시탐탐 대장 수컷이 약해질 때를 노리다가 대장 수컷이 상처를 입어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거나 늙어 기력이 쇠해지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일인자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렇게 밀려난 일인자는 무리에서 쫓겨나 굶어 죽거나 홀로 떠돌다 다른 맹수들의 먹이가 된다.
이런 이유로 인간 세상에서나 동물 세상에서나 일인자는 이인자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행여 이인자가 등장하면 감시와 견제는 기본이고, 자신을 넘보는 미세한 징후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제거한다.
고려 말 일인자의 두터운 신임 속에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다 일인자의 견제를 받아 급전직하 파국을 맞은 인물이 있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일개 승려의 신분으로 파란의 혁신정치를 펼쳤던 신돈(辛旽)이다.
신돈은 경상도 영산 출신으로 1323년 지역 부호인 신원경(辛原慶)과 사찰의 노비인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승려가 되어 각지를 방랑했는데, 어머니가 노비라는 이유로 승려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고, 이런 개인사는 그가 권문세족과 기득권 세력에게 증오를 품게 된 원인이 되었다.
신돈은 마른 몸매에 눈빛이 유난히 빛났고, 사철 누더기를 입고 지냈으며,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신도들을 존귀하게 대하여 생불(生佛)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구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민왕의 꿈에 괴한이 나타나 자기를 죽이려 할 때 한 스님이 나타나 구해주었는데, 다음 날 측근인 김원명(金元命)이 신돈을 소개하여 자세히 보니, 꿈에서 본 바로 그 스님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언변이 좋은 신돈은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은 후 외로워하던 공민왕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고, 신돈의 능력을 높이 산 공민왕은 그를 왕사(王師)로 임명하면서 “신돈은 도(道)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타고난 신분이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큰일을 맡길 만하다”며 신임하였다.
왕사가 된 신돈은 “신은 기꺼이 왕명을 받들어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뢰고 싶은 것은 비록 참언이나 훼방이 있더라도 신을 끝까지 믿어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고,
공민왕은 “스승은 과인을 구하고, 과인은 스승을 구할 것이며, 남의 말에 미혹되지 않겠다고 불타와 하늘에 증명하노라”고 언약하면서 신돈에게 국정을 일임하였다.
왕의 대리인이 된 신돈은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무인 세력을 비롯한 권문세족을 조정에서 밀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되찾아주었으며, 건전한 학풍 조성을 위해 성균관을 재건하여 이색(李穡)・정도전(鄭道傳) 등 신진 문신세력의 등장을 돕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무신 세력과 권문세족은 신돈이 간통을 일삼고 왕에게 무례하다며 공격하였고, 공민왕 역시 권력을 무한정 키워가는 신돈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실제 신돈은 궐밖에 사가(私家)를 짓고 많은 여종을 거느리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고, 그가 궁궐을 출입할 때마다 왕에 버금가는 의례가 행해졌다.
급격한 개혁에 대한 조정 안팎의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거듭된 흉년과 잦은 외적의 침입은 신돈의 입지를 흔들었고, 신돈의 개혁에 피로감을 누적해가던 공민왕은 돌연 신돈의 모든 권한을 거두어들이면서 친정(親政)을 선언하였다.
1369년 공민왕의 의중을 간파한 이인(李韌)이 신돈을 반역죄로 무고하자 공민왕은 별다른 조사 없이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했다가 2년 뒤인 1371년 7월 목을 잘라 죽였다.
일인자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함에 주저함이 없었던 신돈과는 달리 일인자를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고 생존을 위해 굴신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유력한 이인자라는 이유만으로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던 인물이 중국 현대사에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부총리와 원수를 역임했던 린뱌오(林彪)이다.
린뱌오는 1907년 방직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후 공산당원인 사촌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8세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문에 들었다.
졸업 이후 홍군에 합류하여 마오쩌둥(毛澤東)・주더(朱德)와 함께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고,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펑더화이(彭德懷)와 더불어 홍군의 유능한 야전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1937년 제115사단을 이끌고 섬서성에서 일본군 제5사단을 공격하여 격멸하였는데, 이는 중일전쟁 개전 이후 연전연패하던 중국군 최초의 승리로서 공산당의 선전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 원수 계급을 받았고, 1959년 국방부장이 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린뱌오는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한편 안으로는 실속을 챙기는 이중전략을 취하였는데, 마오쩌둥・장칭(江靑)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면서 마오쩌둥 개인숭배에 동조하는 것이 전자의 태도였다면, 당 규약에 자신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명시한 것이 후자의 태도였다.
보신에도 철저하여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회합에서는 언제나 먼저 도착하여 마오쩌둥을 맞았고, 공식 석상에서는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회의조차도 마오쩌둥의 참가 지시가 있어야만 참석했고, 의심을 살까 두려워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는 등 마오쩌둥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신임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나,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당 규약에 자신을 후계자로 올려놓고, 군부의 강한 지지를 받는 것에 경계심을 가졌다. 몸을 낮추어 의심을 피하면서 일인자의 자리를 노리는 교활한 인물로 본 것이다.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이 당의 승인도 없이 소련과의 전쟁을 내용으로 한 ‘1호 계획’을 작성한 것이었다.
후일 마오쩌둥에게 이 계획이 보고되긴 했으나, 마오쩌둥은 자신의 승인도 없이 전쟁 계획이 작성된 것에 격노했고,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만 쓸 수 있는 ‘1호’라는 용어를 쓴 것도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어 국가주석직 신설을 놓고 둘 사이는 더욱 벌어졌고,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을 제치고 주석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1971년 9월 남부 시찰 중 린뱌오를 강하게 비판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비판을 자신에 대한 숙청의 신호로 보고, 공군 중위로 있던 아들과 함께 마오쩌둥 암살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자 가족과 함께 소련 망명길에 올랐다.
그를 태운 비행기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몽골 지역에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는데, 그의 추락사를 두고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되었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중국 정부는 연료 부족이 추락 원인이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인자의 등장을 못 마땅히 여기는 것은 사람 사이뿐 아니라, 국가 간에서도 적용된다. 기존의 패권국이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국가를 견제하는 것이 그렇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자신의 저서 『불가피한 전쟁』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기존 지배 세력의 자리를 위협할 때 벌어지는 극심한 구조적 긴장’을 의미한다고 하며, 세계 각처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져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 나라는 서로 원치 않는 여러 형태의 전쟁을 하고 있으며, 중국이 야망을 축소하거나 미국이 이인자의 자리로 물러나지 않는 한 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투키디데스 함정’은 그리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으로 일인자와 이인자 간의 갈등 관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고대 문화의 발상지이자 정치의 중심이었던 그리스는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동맹’이 상호 경쟁하고 있었는데, 양 세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팽팽해서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BC 492년부터 40년간 계속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델로스동맹’이 승리를 거두면서 아테네가 급속히 성장하자 기존 패권국인 스파르타가 질투심과 불안감을 느껴 아테네와 전쟁을 벌였다.
28년간이나 계속된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면서 델로스동맹은 해체되고, 아테네는 몰락했으며, 그리스의 패권은 스파르타에게 넘어갔다.
현대 국제경제사에서도 기존의 경제 패권국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신흥 경제국의 성장세를 꺾어버린 사례가 있다. 전통의 경제 패권국인 미국과 그 자리를 위협하는 일본과의 사이에 있었던 「플라자 합의」가 그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제국을 제치고 유일한 패권국이 되었으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로 세계 지도국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었다.
반면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성공한 일본은 엔저와 기술경쟁력으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통한 고도성장을 이루며 미국의 지위를 위협했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일본의 지나친 무역흑자를 축소하기 위해 198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미・영・프・독・일) 재무장관 회의를 열어 엔화 인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플라자 합의’를 채택했다.
이 합의로 달러화 가치가 30% 급락하면서 미국제품은 가격경쟁력을 회복하였고, 이후 미국은 장기 호황을 누리며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당시 전 세계 부(富)의 16%를 차지하며 기세등등했던 일본은 수출이 급격히 꺾이고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인자가 일인자의 견제 속에 핍박받지는 않으며, 오히려 일인자의 비호 속에 특혜를 누리며 사는 이인자도 있다.
일인자에게 그 자리를 탐내지 않겠다는 확고한 믿음을 주며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이는 이인자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이런 유형의 인물이 있었다.
이인자로 군림하면서도 위협받지 않고 생의 마지막까지 권세를 누리며 영향력을 잃지 않았던 이른바 ‘영원한 이인자’ 김종필(金鍾泌)이다.
김종필은 192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면장을 지낸 부친 김상배(金相培)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여 보통학교와 공주중학교를 거쳐 대전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직업군인의 삶을 시작했다.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김종필은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되어 요직인 정보장교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육사 2기생 출신으로 상황실장을 하고 있던 박정희(朴正熙)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평소 김종필을 좋게 보고 있던 박정희는 형인 박상희(朴相熙)의 큰딸 박영옥(朴榮玉)을 중매하였고,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1960년 항명 파동으로 중령 때 강제 전역을 당하기도 했으나, 35세 때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여 군에 복귀한 후 대령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전역 후에는 공화당 의장, 국무총리 등의 직책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박정희 정권 내내 이인자의 자리를 유지했다.
한때 중앙정보부로부터 세 차례의 가택수색을 당하고, 수시로 도청을 당하는 등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를 후계자로 인식되어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일인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후에도 정치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잃지 않았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정치 전면에 나선 신군부 세력에 의해 한때 부정 축재자로 몰려 다소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후일 충청권의 대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심지어 과거 적대적 정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대중 정부 때에도 정치적 탄압을 받기는커녕 실세 국무총리로서 이인자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DJP 연합을 선언하는 김대중과 김종필
그는 역대 정부에서 국무총리만 7년을 역임하는 등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정치적 호사를 누렸고, 정계 은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했으며, 천수를 다하는 날까지 추종자들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그는 최고가 아니면서 최고에 버금가는 영광 속에 평생을 살았던 ‘실속형 이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