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에 어긋난 짓을 하면 사람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고 비난한다.
그러나 하늘은 정의를 관장하지 않으며, 정의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에 관심도 없다.
또한, 하늘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으며, 기쁨과 슬픔을 공평하게 배분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선행을 했으니 보답을 받을 것이라 기대해서도 안 되고,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벌 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 안심해서도 안 된다.
실제 선행과 악행은 이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악행을 한 경우 그나마 양심 있는 소수에 한정하여 다소의 죄책감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정의니 공정이니 진리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열패감을 일시 잠재우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이거나 그도 아니면 대중의 호응을 끌어낼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한 정치꾼들이 어쩔 수 없이 내세우는 궁색한 선거 구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세상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힘’이다. 힘의 정도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나누어지고,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고,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을 뿐이다.
힘은 사회적 평가의 기준을 정하는 것에도 관여한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예의를 행하면 겸손하다고 칭송하는 반면, 사회적 열세에 놓인 사람이 예의를 행하면 굴종이라 비웃는 것이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평가할 때도 어김없이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세계 패권을 쥐고 있었던 서구인들은 동・서양이 최초로 자웅을 겨루었던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서구의 아테네가 승리한 것을 두고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고, 원주민이 자자손손 뿌리를 내리고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총포로 점령하고는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불모지를 개척한 것 인양 ‘신대륙 발견’이라 말하는 것이 그렇다.
세상의 이치가 이러함에도 약자들은 메아리 없는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고, 각종 선거에 나서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의 행복을 위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겠노라며 온갖 공약을 쏟아낸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니, 정의롭게 하겠다고 외쳐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힘의 논리가 좌우함을 일찍이 간파하고 무력을 통해 조국을 단기간에 유럽 최강국으로 만든 특출한 인물이 근대 유럽에 있었다. 독일의 명재상 비스마르크이다.
독일은 중세 이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서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크고 작은 국가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랬던 독일에서 통일의 기운이 솟아나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빌헬름 1세가 있었다.
1861년 프로이센 왕위에 오른 빌헬름 1세는 독일 통일을 염두에 두고 군사력 강화를 위한 군비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프로이센 의회는 국민 부담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었다.
빌헬름 1세는 독일 연방의회 프로이센 대표로 있던 비스마르크를 재상에 임명한 후 어느 날 그를 불러 독일 통일 방안을 물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독일의 통일은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제압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의회 단상에 선 비스마르크는 단호한 어조로 당시 대세를 형성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여론을 반박하는 그 유명한 연설을 시작했다.
“당면한 문제는 연설과 과반수의 찬성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무엇보다도 '철(鐵)과 혈(血)'을 통한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를 ‘철혈재상’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비스마르크는 논쟁으로 날이 새는지 몰랐던 비능률의 의회 기능을 4년간 정지하고, 군대를 개혁하여 강군으로 육성하였으며,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향후 통일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제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보고, 외교협상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주변국들로부터 고립시킨 후 7주간의 단기총력전을 펼쳐 오스트리아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이어 군비 확장을 통해 전쟁 준비를 마친 후 보불전쟁을 일으켜 스당(Sedan)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하였으며, 8만 3천 명의 프랑스군과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았다.
프로이센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진군하여 파리를 함락함으로써 프랑스로부터 보상금 50억 프랑과 알자스・로렌 지역을 획득했으며, 이로써 유럽 변방의 느슨한 국가연합체에 불과했던 독일은 일약 유럽 최강국으로 도약했다.
일반적으로 나라 간의 전쟁은 군인들 간의 전투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나라에 힘이 없으면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민간인이 침략군에 의해 살육되기도 한다.
거대한 영토와 무한한 잠재력이 있으면서도 미처 힘을 키우지 못한 20세기 초 중국에서 이 같은 사건이 있었는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남경대학살’이 그것이다.
노구교(盧構橋)사건을 시발로 본격적인 중국 침공에 나선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후 1937년 12월 10일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향해 진군했다.
일본군과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웠던 국민당의 영수 장제스(蔣介石)는 작전상 후퇴를 명했고, 남경을 무혈 점령한 일본군은 미처 후퇴하지 못한 중국군 병사는 물론 민간인들조차 잠재적 적군으로 보아 총검으로 집단 살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수류탄을 던지거나 기관단총을 쏘는 등 집단 총살을 했지만, 총알을 아낀다는 명목을 내세워 군도(軍刀)로 머리를 자르고,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거나 생매장을 했으며, 갓난아이를 공중에 던진 뒤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특히 여성이라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간하였고, 살해하기 전 근친상간을 시키기도 하는 등 인간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반인도적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악마적 살인 행위는 6주가 넘도록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약 30만 명의 중국인이 살해되었다.
종전 후 극동 국제군사재판소는 ‘남경대학살’과 관련하여 당시 군사령관이었던 마쓰이 이와네를 비롯한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를 사형에 처했으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아사카 야스히코는 왕족에게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미국 방침에 따라 면책되었다.
죄 없는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현재 일본에서는 남경대학살 피해자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으며, 일부 극우단체는 남경대학살 사건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아무리 평화를 부르짖어도 강국의 무력 앞에 짓밟히고 억압받는 게 엄연한 현실인데, 하물며 힘없는 개인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랴.
인권 의식이 더없이 높아진 오늘날에도 힘의 논리는 여전해서 가진 자들의 횡포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옛말이 생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