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없이 생기는 행운을 두려워하라

by 노을 강변에서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유래에 관해 여러 속설이 있지만, 나폴레옹이 포병 장교 시절 네 잎 클로버를 뜯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순간 총알이 지나가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어쨌든 생태학적으로 네 잎 클로버가 생길 확률은 일만 분의 일이라고 하니, 행운을 만나는 것은 희귀한 경험에 가깝고, 어쩌다 큰 행운이 찾아왔다면 다시 올 가능성은 없다고 여기는 게 좋을 것이다.


로또복권이 2002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면서 복권구매를 홍보하는 문구로 ‘인생역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일주일마다 당첨자가 발표되는 이 복권에는 적게는 수억 원에서 크게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당첨금이 걸려있어 일단 당첨되면 그야말로 인생이 역전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은 그 이후 행복했을까?


2014년 로또 1등 당첨자의 인생이 두 번의 역전을 맞는 기막힌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과거 로또 1등에 당첨되었던 한 남성이 당첨금을 모두 날리고 빚까지 져서 사기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남성은 11년 전 24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어 세금을 떼고도 189억 원을 수령했는데, 역대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이었다.


한순간에 벼락부자가 된 그는 친인척의 병원 설립 등 이곳저곳에 투자했지만, 손대는 사업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당첨금 대부분을 탕진했다.


한동안 그에게 많은 여성이 접근했고, 마음에 드는 여성과 결혼까지 했지만, 돈이 바닥난 그의 곁에 머물 리 없었다.




이혼 후 마지막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돈을 빌려 주식투자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못해 수억 원의 빚만 남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한 여성에게 돈을 빌린 뒤 이를 갚지 못해 사기 혐의로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피해 여성에게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로또 1등 당첨금 240억 원의 영수증과 서초구에 있는 20억 원 상당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 매매계약서를 보여주며 재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고소당한 후 경찰 출두에 응하지 않고 3년 넘게 찜질방을 전전하며 도주 행각을 벌이던 그는 결국 경찰에 붙잡혔고, 그때의 행색은 노숙자의 꼴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행운으로 인생이 역전되었다가 그 행운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노숙자로 역전된 기막힌 사연이었다.




2019년 가을이 깊어가던 무렵 더욱 비극적인 로또 1등 당첨자의 사연이 방송의 전파를 탔다.


이 사건은 평범한 가장이던 A씨가 수년 전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어 8억 원의 횡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A씨는 평소 우애가 남달라 당첨금 중 3억 원을 떼어 누이와 남동생 둘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고, 비극의 주인공인 남동생 B씨는 그 돈을 집을 사는 데 사용했다.


이후 A씨는 나머지 당첨금으로 가게를 열어 장사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잘되던 장사가 갈수록 어려워져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고, A씨는 부득이 동생 B씨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이자를 내는 조건으로 B씨의 집을 담보로 4,500만 원을 빌렸다.


이후 가게는 계속 어려워져 A씨는 매달 내는 25만 원의 이자조차 갚지 못하게 되었고, B씨가 은행으로부터 이자 납부의 독촉을 받게 되면서 두 형제는 돈 문제로 자주 다투었는데, 사건 당일 B씨의 거친 말에 분격한 A씨가 흉기로 여러 차례 B씨를 찔러 살해한 것이다.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이 없었거나 형제간의 우애가 덜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불행이었다.




1978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필립 브리크먼 교수는 복권 당첨이 행복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5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사이의 복권당첨자 22명을 추적한 결과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오히려 일상에서의 행복감은 복권에 당첨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다소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미국 뉴욕대 로스쿨 조사에 따르면 복권 1등 당첨자의 파산 확률은 3분의 1에 이른다고 하며, UC버클리의 캐머런 앤더슨 교수는 “갑자기 불어난 재산으로 인한 행복감은 고작 9개월”이라면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영원히 행복을 누릴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인생 총량의 법칙’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기쁨・슬픔・행복・불행 등을 비롯한 모든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전체 수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술에도 정량이 있어서 젊은 시절 지나치게 술을 탐닉하면 늙어서는 술을 마시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고, 남은 여분의 술은 죽은 이후 자손에 의해 무덤가에 뿌려진다고 한다.




행운이나 불행도 다를 바 없어서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커다란 행운이 찾아왔다면 그와 비례하여 다가올 불행에도 대비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황제라는 엄청난 행운을 얻은 후 아무런 대비 없이 행운만을 즐기다가 처형으로 생이 마감된 불행한 인물이 19세기 후반에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본 멕시코의 마지막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이다.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는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적 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아 독립을 위한 대규모 저항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런 노력은 1821년 독립공화국 멕시코의 탄생을 낳았으나, 영토에 욕심을 내고 있던 이웃 나라 미국의 공격을 받아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영토의 절반가량을 빼앗겼다.


신생 독립국 멕시코가 정국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의 침략까지 받아 정치・경제적으로 대혼란상태에 빠지자 오래전부터 멕시코를 탐내던 나폴레옹 3세는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여 멕시코 영토를 빠르게 점령해 갔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괴뢰정부의 필요함을 느낀 나폴레옹 3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아노를 멕시코의 꼭두각시 군주로 선택했다.


나폴레옹 3세로부터 느닷없이 멕시코 황제의 자리를 제안받은 막시밀리아노는 1832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황족으로 태어나 북이탈리아 영토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을 지낸 인물로 그동안 누리고 있던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가 1864년 6월 10일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img.jpg 막시밀리아노 1세

그러나 당시 멕시코의 재정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고, 미국을 등에 업은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은 나날이 커가고 있어 통치 여건이 녹록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져 국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미국은 남북전쟁을 종결한 후 먼로주의를 내세우며 프랑스군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 프로이센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나폴레옹 3세가 자국 방어력 증강을 위해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자 막시밀리아노 정부는 그 즉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낙심한 막시밀리아노는 스스로 물러나려고도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머뭇거리는 사이 왕궁으로 들이닥친 공화파 세력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 이탈리아 통일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를 비롯한 유럽의 군주들이 공화파의 지도자 후아레스에게 막시밀리아노의 구명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후아레스는 “함부로 내정간섭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 기회에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며 처형을 명했고, 결국 1867년 6월 19일 막시밀리아노는 케레타로 교외의 한 언덕에서 총살되면서 3년간의 짧은 황제 생활을 마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름 없는 일개 무당이 우연히 얻은 행운으로 군호(君號)를 받고 조정의 고관이 되어 국정을 좌우하다 비극으로 인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다. ‘진령군(眞靈君)’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선왕조가 서서히 침몰해가던 즈음인 1882년 구식군대가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당시 신식군대는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구식군대는 여러 면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고 있어 불만이 많았다.


img.jpg '별기군'이라고 불린 조선 말 신신군대 모습


누적된 차별로 울화를 쌓아가던 구식군인들의 감정이 폭발한 것은 봉급미 농간이었다.


선혜청(宣惠廳)이 13개월 동안 미루다 지급한 구식군인들의 봉급미는 한 달 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모래가 반 넘게 섞여 있었다.


격분한 구식군인들은 신식군대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소위를 살해하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이 살해되었다.


다음날 더욱 세를 불린 군민은 대원군을 찾았고,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명성황후(明成皇后) 제거를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복한 후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목사로 있던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난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명성황후에게 민응식이 관우(關羽)의 딸을 자칭하는 한 무당을 소개해 주었고, 그 무당은 50일 이내에 환궁하게 될 것이라며 환궁 날짜까지 일러주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명성황후는 무당이 예언한 날에 환궁하였고, 무당의 신통함을 전해 들은 고종은 그녀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천민으로 취급받던 무당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군호가 내려진 것은 조선왕조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일이었다.


이후 고종 내외가 진령군을 총애하면서 조정의 신료들은 그녀에게 줄을 대려 애썼고, 그녀와 의남매를 맺거나 의붓아들이 되려는 자들도 부지기수였으며,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종의 뒤에는 명성황후가 있고, 명성황후의 뒤에는 진령군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진령군은 고종을 움직여 허약한 세자(후일 순종)의 병을 고친다는 구실로 금강산 각 봉우리에 쌀 한 섬, 돈 천 냥, 무명 한 필을 올리게 하고, 수시로 굿판까지 벌이니,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궁에 무당이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 또한 흉흉해졌다.


곱지 않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던지 진령군은 명성황후에게 “저는 본디 관운장의 딸이니, 관운장 사당을 지어주면 그리로 옮기겠습니다”라고 진언하였고, 창덕궁에서 코 닿을 거리에 그렇게 북묘(北廟)가 세워졌다.


이후 고종 내외가 북묘를 자주 찾아 점을 치고 굿도 하니, 민심 이반은 가속화되고 백성들의 분노 또한 높아갔다.


세도가 꺾일 줄 몰랐던 진령군의 영화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개화파로 구성된 내각은 진령군을 혹세무민의 죄로 옥에 가두고, 그동안 모은 산더미 같은 재물을 모두 몰수하였다.


진령군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삼청동 오두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과 지석영(池錫永)의 탄핵을 받아 거열형을 받고 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무서우리만큼 공평하다.


하늘은 아무런 이유 없이 복을 주지 않으며, 행여 복을 주면 그것에 비례하는 고통도 함께 얹어 준다.


사마천(司馬遷)은 “까닭 없이 생기는 이익은 불행의 근본이다”라고 하여 힘들여 노력하지 않고 거저 찾아오는 이득은 오히려 취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