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언(直言)’의 사전적 의미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기탄없이 말함’이다.
용어의 의미에서 살펴볼 수 있듯 직언의 주체는 대체로 성품이 강직한 사람이며, 역사적으로 직언을 외면한 군주는 어김없이 패망의 길을 걸었다.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충신이 있어야 나라가 온전히 보존되고, 후세의 사표(師表)가 된다는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고금의 진리이지만, 이상하게도 충신은 주로 무너지는 왕조에 존재한다.
그래서 충신이란 말라가는 비극의 호수에 피어나는 마지막 연꽃과도 같다.
『한비자(韓非子)』에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거꾸로 박힌 비늘’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분노’를 비유하는 말이다.
한비자는 “용은 성질이 유순하므로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밑에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거꾸로 솟은 비늘이 있어서 용을 길들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를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으니, 군주를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역린을 건드리지 않아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여 섣부른 직언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흔히 충신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마지막이 순탄치 못했던 것은 비참한 말로가 있어야만 충신으로 기록해주는 역사학자들의 유별난 성향 탓이기도 하지만, 주된 원인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관철할 충분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군주에게 직언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충신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비간(比干)이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살육을 일삼는 폭정을 지속하자 승상이었던 비간은 이를 비판하며 올바른 정치를 하라고 직언하였다.
주왕은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 있다고 하던데, 어디 한번 열어보자”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 죽였다.
조선 시대 김처선(金處善)도 직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인물 중 하나이다.
세종(世宗) 때부터 환관이었던 그는 본래 직언을 서슴지 않아 주위의 미움을 사는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관작이 삭탈되고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의술이 인정되어 연산군(燕山君) 때 복직되어 시종이 되었다.
직언하는 습성은 연산군에게도 이어졌지만, 연산군은 화를 내면서도 쉽게 용서해주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스스로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추며 음란 행각을 벌이자 김처선은 “이 늙은 신(臣)은 4대에 걸쳐 임금을 섬겼으나, 고금의 군왕으로 이토록 문란한 적은 없었소이다”라며 간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지 연산군은 직접 활을 들어 김처선을 쏘았는데, 쓰러진 후에도 간언을 멈추지 않자 그의 다리를 자르고 혀를 잘라 죽였다.
직언 수신자의 감정이 상하는 것은 직언의 내용이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기 때문이겠지만, 직언 발신자의 거친 말투가 감정 훼손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내용의 직언을 하였음에도 말투가 달라 전혀 다른 운명을 맞게 된 두 사람의 사례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는 세자를 교육하는 세자시강원 소속의 관원으로 연산군(燕山君)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훈육을 하는 스승이었다.
연산군은 선천적으로 책을 벌레 보듯 하며 공부를 싫어하였고, 스승의 가르침도 잘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허침은 “정해진 것이니 배우셔야 합니다”라며 항상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는 방식을 취했으나, 조지서는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연산군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하루는 세자가 강론을 듣지 않고 딴전을 피우자 조지서는 책을 세자 앞에 내던지며 “저하(邸下)가 이렇게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신은 마땅히 주상께 아뢰겠습니다!”라며 야단을 치기도 했다.
이런 두 사람에 대해 연산군은 “허침은 큰 성인이고, 조지서는 큰 소인배이다”라는 낙서를 벽에 하기도 했는데, 이를 본 신료들이 세자의 속셈을 읽고는 조지서의 미래를 걱정했다.
조지서는 후일 연산군이 즉위하자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벼슬을 내려놓고 지리산 아래에 은거하였는데, 연산군은 조지서가 생모의 폐비사건에 관여했다며 서울로 압송시켜 처형시키고 시신을 토막 내어 한강에 던져버렸다.
그에 반해 허침은 승진을 거듭하여 후일 좌의정까지 올랐다.
조지서는 스승으로 마땅한 일을 했고, 비뚤어진 제자를 바로잡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까칠한 직언을 훈육의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 원인이 되어 대역죄에 버금가는 최후를 맞아야 했다.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世宗)조차도 직언을 불편해했다는 사료가 조선왕조실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태종(太宗)은 음행(淫行)과 기행(奇行)을 일삼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세자한 후 경기도 광주로 내치면서 “내가 죽은 후에도 양녕을 한양에 내왕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태종 사후 양녕대군은 도성 출입금지령을 수시로 어겼고, 세종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한번은 양녕대군이 공신 윤자당(尹子當)의 첩 윤이(閏伊)와 간통한 것이 드러나 윤이가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사죄는커녕 뻔뻔하게도 윤이의 석방을 세종에게 탄원하면서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웠고, 세종은 그런 양녕대군을 처벌하는 대신 윤이를 석방하였으며, 어의(御醫)를 보내 양녕대군을 치료해주기조차 했다.
이 같은 세종의 처사에 사헌부 관리들이 양녕대군을 처벌하라고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세종은 굳은 얼굴로 “옛말에 세 번 직언해도 듣지 않으면 사직한다고 했거늘, 당신들도 그만두면 되지 어찌 말이 많은가”라며 짜증을 냈다.
세종의 옳지 않은 처사에 분개한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항의를 표하자 당황한 세종은 다음 날 이들의 사직서를 모두 반려하며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으나, 집단 사직 파동이 잠잠해지자 사사건건 간섭을 일삼는 신하들을 손봐야겠다고 여기고 대사헌 김맹성(金孟誠)을 형조참판으로 좌천시키고, 사헌부 장령(掌令) 몇 사람을 파면시키는 등 엄포를 놓았다.
세종은 이로써 양녕대군 사건이 봉합될 것으로 여겼는데, 며칠 후 사간원 헌납 최효손(崔孝孫)과 신임 사헌부 장령 진중성(陳仲誠)이 또다시 양녕대군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서자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여긴 세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새삼스럽게 9년 전 세금 포탈범을 눈감아 줬다는 죄명으로 김맹성을 파면시켰다.
직언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으로만 여기기 쉬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좋은 말로 타일러도 될 것을 폐부를 찌르는 싸늘한 말로 호되게 나무라는 것이 그렇다.
물론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직언보다야 위험이 덜하겠으나, 부하를 매몰차게 대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생을 그르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사람들이란 열 마디 칭찬 끝에 한 마디 야단만 들어도 그 한마디에 섭섭함을 느낀다.
그래서 지혜로운 상사는 공개적으로 부하를 질책하지 않으며, 꾸짖을 일이 있으면 사람들을 물리친 후에 조용히 한다.
공개적 질책은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는 효과는 고사하고, 모욕감만을 주므로 굳이 망신을 줄 목적이 아니라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직언의 의도나 목적이 어떠하든 직언에 순응하면 적극적으로는 인생을 살찌우고 소극적으로는 패망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직언은 쓰지만 삼켜야 할 양약(良藥)과도 같다.
역사를 살펴보면 직언에 귀를 막아 나라를 기울게 한 군주는 흔하지만, 직언에 관대했던 군주는 찾기 어려운데, 직언을 달게 여기고 직언하는 신하를 중히 여겨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고금에 보기 드문 군주가 있었다.
당(唐)나라 제2대 황제 태종(太宗)이다.
이세민(李世民)은 599년 대장군이자 수양제(隋煬帝)와 이종사촌 사이인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군인이 되었다.
이연은 평소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있던 무렵 수양제(隋煬帝)가 대규모 토목공사와 가혹한 세금 징수로 백성의 원성을 사면서 인심을 잃자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휘하의 3만 병력을 수도 장안(長安)으로 휘몰아 수나라를 멸하고 당(唐)을 건국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이연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는 일찍 죽고, 나머지 형제 중 둘째인 이세민이 가장 영민하였다.
이세민은 개국에 가장 공이 큰 자신이 황태자가 될 것이라 내심 기대했으나, 황실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버지가 적장자인 이건성(李建成)을 황태자로 세우자 불만이 컸다.
때를 노리던 이세민은 첫째 이건성과 넷째 이원길(李元吉)이 황제의 후궁을 희롱했다고 거짓 고변을 하여 아버지가 두 아들을 궁으로 소환하게 만든 후 현무문(玄武門)에서 자신의 활로 이건성의 목을 쏘아 즉사시키고, 이원길마저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후 아버지를 겁박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니, 이 사람이 당태종(唐太宗)이다.
천하의 주인이 된 이세민은 이건성을 따르던 무리의 숙청에 나섰는데, 특히 위징(魏徵)은 일찍이 이세민의 야욕을 눈치채고 이건성에게 여러 차례 이세민을 없애야 한다고 진언했던 인물이었다.
이세민은 묶여서 끌려온 위징에게 “네가 우리 형제를 이간질하였으니 살기를 바라지 마라”며 꾸짖자 위징은 “나는 내가 모시는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한 죄밖에 없습니다. 태자가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났겠습니까”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세민은 단상에서 내려와 몸소 위징의 포박을 풀어준 후 이전보다 높은 벼슬을 내려 자신을 위해 일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렇게 당태종과 위징은 군신 관계가 되었다.
제위에 있는 동안 당태종은 늘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간언하도록 장려했는데, 가장 신랄하게 직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위징이었다.
위징은 시도 때도 없이 당태종에게 쓴소리를 쏟아냈고, 당태종은 이런 직언을 한 마디도 마다하지 않고 보약 먹듯 했다.
당태종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형제를 살육하고 아버지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패륜을 저질렀지만, 인물됨은 실로 출중했다.
교만하지 않고 검소했으며, 특히 문벌에 상관없이 고루 인재를 등용했다.
신하들의 직언을 유도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가장 우선에 두었던 당태종은 내치와 외치는 물론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빛나는 업적을 남겨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이른바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루었다.
이와는 달리 처음에는 신하의 직언을 달게 받아들여 나라를 융성시켰다가, 말년으로 갈수록 직언을 멀리하고 아첨을 가까이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나라를 기울게 한 군주가 있었다. 당현종(唐玄宗)이다.
현종은 685년 당(唐)나라 제5대 황제 예종(睿宗)의 3남으로 태어났다.
710년 제4대 황제 중종(中宗)의 부인인 위황후(韋皇后)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결탁하여 남편인 중종(中宗)을 암살하고, 현종의 아버지인 상왕(相王:후일 예종)까지도 해치려 했다.
이를 간파한 현종은 심복 병사를 동원하여 위황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제거한 후 아버지를 황제(예종)로 옹립하였다가 28세 때 예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올랐다.
현종은 환관과 인척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백성을 핍박하는 권세가들을 엄히 다스리는 동시에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의 조언을 중히 여기고 상벌을 분명히 했다.
또한,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민생을 돌보게 하고, 나라에 가뭄이 들면 궁궐의 쌀을 풀어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펼치니, 중종 이후 어지러웠던 국정은 비로소 안정되고 나라는 강성해졌다.
사람들은 현종의 정치가 당태종 때의 태평성대인 ‘정관(貞觀)의 치’에 버금간다고 하여 당시 연호인 ‘개원(開元)’을 붙여 ‘개원(開元)의 치’라 불렀다.
현종 집권 전반기의 번영은 현종의 뛰어난 역량이 바탕이 되었지만, 신하들의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현종의 정치적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음 일화를 살펴보면 현종이 신하들의 직언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잘 알 수 있으며,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 생각해도 감동을 멈출 수 없다.
한휴(韓休)는 현종 때의 재상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쓴소리가 얼마나 심했던지 현종의 얼굴이 야윌 정도였다.
하루는 현종이 사냥을 나갔는데, 몹시 불안해하며 근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본 신하가 이유를 묻자 현종은 “내가 사냥하는 것을 한휴가 알면 어쩌지”라며 걱정했다.
그 신하가 “한휴가 조정에 들어온 뒤로는 폐하께서 하루도 즐겁게 지내지 못하시고 몸도 야위셨습니다. 왜 한휴를 내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현종은 “한휴 때문에 나는 말랐지만, 천하는 살찌지 않았는가. 이전에 내숭(萊嵩)이 재상으로 있을 때는 모든 일을 내 말대로 따랐지만, 잠자리에 누워서도 천하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한휴의 말을 따르면 귀에는 거슬려도 천하에 대한 걱정이 없어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군주가 신하의 고언을 이처럼 달게 여기니, 현종 초기 태평성대가 펼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현명했던 현종이었으나, 노년에 접어들어 양귀비(楊貴妃)에 빠지면서 직언을 멀리하고, 간신배를 총애하며, 정치에도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말년의 현종이 얼마나 아부를 좋아했는지 간신 안록산(安祿山)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안록산은 뚱뚱하고 배가 불룩 나왔는데, 현종이 안록산의 튀어나온 배를 보고 웃으며 “경의 배에는 무엇이 들어있기에 그렇게 볼록한가”라고 묻자 안록산은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이 제 배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현종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안록산에게 무려 세 지역의 절도사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이는 당나라 전체 절도사의 병력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은밀히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기르며 기회를 엿보던 안록산은 755년 15만 병력으로 순식간에 낙양을 점령한 후 장안을 향해 진군하였고, 안록산의 반란을 반신반의하며 궁에 머물던 현종은 반란군이 도성 근처까지 몰려오자 그제야 궁을 빠져나와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을 따라나섰던 양귀비는 성난 군중들과 호위 병사들에게 나라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어 살해당하고, 현종은 낙담하여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한 후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다.
오래지 않아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후 현종은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예전의 권위는 찾지 못한 채 양귀비를 그리며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고, 강성했던 당나라의 국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직언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지만, 마땅히 직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이 직언을 배척하는 것 역시 위태롭다.
실로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이야말로 고금에 다시없는 명언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