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의 식물이 아닌 이상 감정을 멀리하고 냉철한 이성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과격함에 몸을 맡기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평정심을 잃고 격정에 휘말릴 때 시작되며, 한 국가의 운명도 집권층이 과격성을 띨 때 파국을 맞는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시민계급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평등사상을 세계에 전파한 위대한 시민혁명이 발생했다.
봉건시대에서 근대 시대로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류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일컫는 ‘프랑스 대혁명’이다.
혁명은 루이 16세가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루이 14세 때부터 위기의 조짐을 보이던 프랑스의 재정은 해를 거듭할수록 악화해 가다 루이 16세 때에 이르러서는 파탄상태에 빠졌다.
루이 16세는 이를 타개하고자 삼부회를 소집하고, 토론 주제를 재정문제에 국한하기로 하였으나, 무거운 과세에 시달리던 평민층은 구체제 모순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논의의 주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자 루이 16세는 삼부회의 강제해산을 시도했고, 여기에 반발한 평민층은 제도개혁을 요구하는 것에서 기존 권력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자는 쪽으로 급변했다.
분노한 민중의 발길은 구체제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고,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프랑스 절대 왕정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혁명의 기운이 나라를 뒤덮으면서 과격이 일상인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급진파인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였다.
정권을 장악한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 혁명정부는 개혁 입법을 잇달아 통과시키면서 최고가격제와 배급제를 강행하였고, 재판절차를 생략한 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황족들을 단두대로 처형한 후 그 머리를 거리에 뒹굴게 했다.
이러한 공포정치의 과정에서 대략 30만 명이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었고, 그중 2천여 명이 혁명광장(현 콩코드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자코뱅파의 주도 세력은 혼란된 국가를 안정시키고 반대 세력의 준동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공포정치가 최선의 방책이라 여겼으나, 혁명 입법으로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보수화되고, 시민들이 공포정치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반동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던 부르주아 계층의 지롱드파는 민심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불시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혁명 정신을 부르짖으며 1년 동안 극단의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되기 전 턱에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년 6개월 전 루이 16세를 처형했던 그 단두대에서 21명의 혁명 동지와 함께 체포된 지 하루 만에 머리가 잘리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 전역에 걸쳐 자코뱅파에 대한 대대적 학살이 진행되었고, 이들에 의해 도입된 보통선거제・노예제 폐지・최고가격제 등과 같은 혁명 입법은 모두 폐지되었으며, 프랑스는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극단적 변화는 극단적 반동을 초래한다는 역사의 순리가 어김없이 작동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서도 로베스피에르와 유사한 인물이 있었다.
중종(中宗) 때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과격한 정치실험을 하다 반동 세력의 공격을 받고 몰락한 비운의 혁명가 조광조(趙光祖)이다.
1506년 몇몇 신하들이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성종(成宗)의 차남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상에 앉은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中宗)은 즉위 후 10년 가까이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임금 자리를 지키는 것에 급급했으나, 기세등등하던 핵심 공신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신진사류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이 무렵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 사림(士林)인데, 이들은 그동안 조정을 좌우하던 공신 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죄악시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선을 설계하려 하였고, 그 중심에 조광조가 있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년) 29세에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34세가 되던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 요직을 맡으면서 존재감을 높여갔다.
강직하고 추상같은 그의 의기는 기존 정치 질서를 개혁하려는 중종의 뜻과도 부합하여 승진의 속도가 빨랐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그를 따르는 사람 또한 늘어갔다.
조광조는 왕의 절대적 신임과 사림들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이 평소 꿈꾸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세력은 임금의 철저한 수신(修身), 현량과(賢良科) 시행, 향약 보급 등 정치개혁을 추진함과 동시에 정치적 대척점에 있던 훈구세력(勳舊勢力)을 제거하기 위해 중종반정 공신 117명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자격을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 환수를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위훈삭제(僞勳削除)’운동을 추진하였다.
불의의 일격을 받고 뿌리째 흔들리던 훈구세력은 마침 나라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구실삼아 권세를 가진 신하가 장차 모반할 기미가 있으면 지진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중종에게 간언하고, 장차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설을 퍼뜨리며,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고결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로 여겼던 조광조가 왕위를 노린다는 사실에 중종은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다.
누명을 쓴 조광조는 눈에 피가 흐를 정도로 결백함을 호소하였으나, 마음이 돌아선 중종은 선처를 바라는 신료들의 진언을 단호히 물리치고, 조광조를 비롯한 70여 명의 사림을 모두 처형했다.
이후 현량과는 폐지되고, 공신 신분을 박탈당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復勳)되어 빼앗긴 재산을 되찾았으며, 이후 사림의 정계 진출이 봉쇄되면서 혁신은 실종되고 조정의 주도권은 다시 훈구세력에게 되돌아갔다.
개혁을 바라는 중종의 여망에 부응하여 정치 전면에 나섰던 사림세력이 자신들의 이상을 꽃피우지 못하고 퇴장을 강요당한 것은 목표의 비현실성에도 원인이 있었으나, 가장 결정적 원인은 방법의 과격성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유생들을 이끌고 밤새 비를 맞으며 대궐 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사간원 대간을 동원하여 집단으로 사직서를 쓰게 하는 등 극단의 수단을 마다하지 않았고, 훈구대신 중 조광조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타협을 몰랐으며, 군주에게까지 과도한 절제를 강요하여 왕의 측근들조차 그를 적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목적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수단이 과격하면 반드시 후유증을 낳는데, 300년을 유지해오던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처참하게 붕괴한 것도 시위 군중을 과격하게 진압한 것이 원인이었다.
1905년 1월 9일 눈 내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광장에는 가폰 신부가 이끄는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모여 ‘8시간 노동, 국회 소집, 시민적 자유’ 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황제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를 벌였고, 총검으로 무장한 황제의 근위대가 이들을 막아선 채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후 2시 근위대가 느닷없이 시위 군중을 향해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고, 수천 명의 군중이 피를 흘리며 눈 위에 쓰러졌다.
이렇게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차르 정권의 도덕성이 치명상을 입게 되면서 황제는 자애로운 어버이에서 잔혹한 폭군으로 여겨졌으며, 머지않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거듭된 패전과 민생 파탄은 황제의 권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1917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롯된 시위는 이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고, 진압에 나섰던 시위대마저 분노한 민심에 합세하면서 고립무원에 빠진 니콜라이 2세는 동생에게 양위하고 퇴위하려 했으나, 혁명 주도 세력은 이를 거부하고 군주제의 폐지를 선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는 300년 만에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은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 정권에 의해 우랄 지방의 외딴 개인 저택에 연금되었다가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저택 지하실에서 전원 총살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은 “잡초를 돌로 누른다 해서 그 뿌리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며, 돌로 돌을 친다면 두 돌은 모두 부서지게 되니, 나라의 범죄를 줄이려면 도둑 잡는 기술에 힘쓸 것이 아니라, 먼저 백성들이 생계를 위해 범죄로 나아가지 않도록 잘 보살필 일이요. 그리고서 교화에 힘쓰면 저절로 범죄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집권자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2년 동안 대대적인 범죄자 소탕에 나서 일시적으로 강력범죄가 감소하기도 하였으나, 실적을 올리기 위한 구속영장의 남발로 폭력조직원의 절반 이상이 1년 만에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풀려나는 등 범죄 근절로 이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범죄자 검거 과정에서 경찰관 126명이 순직하고, 2,200여 명이 다치는 등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목표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과격한 방법만은 삼가야 한다.
아무리 주장이 정당해도 폭력과 같은 거친 수단이 동원되면 주장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수단의 야만성만 조명되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 약자가 정상적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적 강자의 제도적 폭력만을 부를 뿐 목적 달성을 더욱 요원하게 만든다.
미국 덴버대 에리카 체노워스 교수는 1900년부터 2006년 사이에 발생한 폭력・비폭력 시위를 조사한 후 2012년 발표한 자신의 저서 『시민저항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통해 "전체 인구의 3.5% 이상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지속할 경우 정권은 필연적으로 무너진다"고 주장하였다.
폭력으로 얻은 권력의 생명이 길지 않고,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 인물들이 비폭력을 저항의 수단으로 삼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