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을 최상으로 여기지만,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그러면서 전투에서 이기는 네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벌모(伐謀)’로 지략을 이용해 적의 계략을 분쇄하는 방법을 말하며, 창칼로 다투지 않아도 되므로 ‘최상책’이다.
둘째는 ‘벌교(伐交)’로 주변 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이용하여 적의 동맹을 깨는 방법을 말하며, ‘상책’이다.
셋째는 ‘벌병(伐兵)’으로 군대를 이용해 공격하는 방법을 말하며, 모략을 이용하거나 외교수단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것이므로 ‘하책’이다.
넷째는 ‘공성(攻城)’으로 적국의 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림으로써 오갈 데 없는 적군의 항복을 받아 내는 방법을 말하며, 많은 아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므로 ‘최하책’이다.
최하책인 ‘공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손자(孫子)는 정공법(正攻法)을 의미하는 ‘벌병’도 하책이라 칭하며 좋은 전략으로 보지 않았는데, 아래 이야기를 살펴보면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빈(孫臏)이 정공법을 왜 좋은 전략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위왕(威王)은 여가만 있으면 공족(公族)들과 더불어 말 경주를 즐겼다.
공족이자 장군인 전기(田忌)도 말 경주에 나서곤 했는데, 번번이 위왕에게 졌다. 하루는 전기가 식객으로 있던 손빈을 데리고 나갔는데, 그날도 위왕에게 세 번 겨뤄 세 번 모두 지고 말았다.
손빈은 전기의 패배 원인이 말이 좋지 못한 데 있음을 간파하고, 전기에게 “내일 다시 왕과 내기를 하십시오. 제가 반드시 이기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전기는 “선생이 이기게 해준다면 천금을 걸고 왕과 내기를 하겠소”라며 반겼다.
왕의 허락에 따라 이튿날 열린 말 경주에서 손빈은 전기에게 “왕은 제나라에서 가장 좋은 말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공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은 가장 좋은 말부터 경주에 나서게 하니, 장군은 가장 좋지 않은 말로 먼저 경주하십시오. 또 왕이 중간 말을 타거든 제일 좋은 말을 타시고, 왕이 가장 좋지 않은 말을 타거든 중간 말을 타십시오. 그러면 세 번의 시합에서 처음 한 번은 지더라도 뒤의 두 번은 모두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전기는 손빈이 일러준 방법대로 경주를 하여 위왕을 이겼는데, 위왕이 전기에게 자신을 이긴 비결을 묻자 전기는 손빈을 소개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위왕은 감탄하며 그 자리에서 손빈을 제나라의 군사(軍師)로 삼았다.
훗날 사람들은 부분적 패배를 이용하여 궁극적 승리를 거두는 손빈의 이 전략을 ‘삼사법(三駟法)’이라 불렀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로 상징되는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는 정공법으로 천하를 일시 쥐었고, 정공법으로 천하를 잃은 대표적 인물이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秦)나라에 봉기를 든 여러 나라 중 초(楚)나라의 세력이 가장 컸다.
초의 왕으로 옹립된 회왕(懷王)은 “누구든 가장 먼저 관중(關中)에 입성한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공언하였고, 유방과 항우는 각기 길을 달리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진군했다.
유방은 전투보다는 회유를 통해 성을 접수하였고, 항복한 병사들을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증강해갔으며, 정복지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이는 전략을 구사하여 우호적 세력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항우는 가는 곳마다 항복한 병사들을 생매장하였고, 자신에게 항거한 성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으며, 병사들이 정복지의 민가를 마음껏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간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항우는 무자비한 살육과 초토화로 자신에 대한 항거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의 잔인한 정복전략은 피정복민들의 적개심을 부추겨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의 악순환을 불렀다.
유방의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과 항우의 싸워 이기는 전략은 시간이 갈수록 유방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항우의 거친 정공법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천하의 패권을 쥘 때까지는 힘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것의 무모함을 잘 알고 있었던 한고조(漢高祖) 유방은 정작 황제에 오른 이후에는 과거의 지혜로움을 따르지 않았다.
한(漢)나라 초기 잦은 침략을 일삼던 흉노족에게 정공법으로 대처한 것이다.
유방이 흉노를 직접 정벌하려는 뜻을 밝히자 참모들은 이구동성으로 “흉노족은 짐승처럼 모여 살다가 새처럼 흩어지는 속성이 있어 이들을 뒤쫓는 것은 그림자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며 만류했으나, 유방은 32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흉노는 정예부대를 숨겨두고 본진에는 늙고 약한 군사들만 남기는 위장술을 썼고, 이를 보고 돌아온 한나라 정찰병들은 흉노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고했다.
유방은 믿기지 않아 유경(劉敬)을 보내 재정찰을 하게 했는데, 유경의 보고는 달랐다. “전쟁할 때는 통상 군대의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 애쓰는 법인데, 제 눈에는 흉노의 노약한 군사만 보였으니, 이는 분명히 우리를 속이는 연막전술입니다. 흉노를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보고했다.
유방은 군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유경을 옥에 가두고,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선발대로 나섰으나, 신중론을 물리치고 출정을 강행한 유방의 원정길은 순탄치 못했다.
때마침 찾아온 혹한으로 손가락을 잃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의 정예병 40만 명에게 7일 동안 포위되면서 전멸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진평(陳平)이 흉노 왕비에게 보물을 보내는 등 회유책을 쓴 덕분에 유방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유방은 옥에 갇힌 유경을 불러 흉노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유경은 “흉노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친을 위해 공주를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흉노의 왕은 폐하의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폐하의 외손자가 왕이 될 것이니, 그들과 사돈이 되면 전쟁을 줄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의 어설픈 정공법의 대가는 컸다. 이후 한나라는 힘으로 흉노를 다스리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100년 동안이나 왕가의 처녀를 흉노의 왕에게 바치고 많은 예물을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를 지속해야 했다.
영국이 과거의 영광시대를 마감하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처칠이라는 지도자의 ‘완고한 정공법’이 그 원인 중 하나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국은 17세기 초부터 식민지 개척을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의 30% 정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 최강국의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
영토나 인구 면에서 다른 강국보다 열세에 있었던 영국이 그토록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자체 국력에 의했다기보다는 다른 나라와의 협력을 통한 뛰어난 동맹외교를 활용한 덕분이었다.
즉 영국의 전통적 대외전략은 상대가 강성할 때는 적절한 타협을 통해 관망하다가 상대의 힘이 약해지면 다른 나라와 힘을 합해 공격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석권했을 때에도 영국은 프랑스와 전면전을 피하면서 적절한 타협 속에 기회를 엿보다 때마침 프랑스가 러시아에 패해 수세에 몰리자 그 즉시 연합군을 형성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영국은 자신의 국부를 유지하면서 프랑스・러시아의 군사력을 활용하고 미국을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식민지 정책에서도 영국은 기껏해야 수백・수천 명의 군대만을 현지에 주둔시키면서 식민지 국민을 자극하지 않았고, 식민지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며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간접통치의 방식을 채택하여 본국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하였다.
직접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주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영국의 전략은 언제나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를 거두는 가성비 높은 결과를 가져다주었고, 영국을 수백 년간 세계지도국으로 군림하게 하였다.
그랬던 영국의 대외정책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은 윈스턴 처칠이 61대 총리로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어릴 때부터 병정놀이 외엔 관심이 없었던 처칠은 사관학교에 두 번이나 낙방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지 못했고, 말을 살 돈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는 기병 병과로 간신히 합격하여 군인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으며, ‘사납고 고집스러운 불독’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타협을 몰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이 주변국을 전격적으로 점령하며 한창 기세를 올릴 때 영국 여론은 전통적 대외전략인 ‘작전상 후퇴’, 즉 협상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처칠은 독일과의 전략적 타협을 거부한 채 자국의 모든 자원을 전쟁에 쏟아붓는 총력전을 선택했다.
처칠이 당시 BBC 방송을 통해 행한 연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정공법을 숭상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장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칠의 대책 없는 정공법의 결과는 참담했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에 영국은 이미 재정 파탄상태에 빠졌고, 미국에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되면서 예전의 영광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독일에 전 국토가 점령된 프랑스도, 패전으로 쑥대밭이 된 독일도 전후 3년이 지나지 않아 전쟁 이전의 경제 상태를 회복했지만, 영국은 전후 2년이 지난 1947년까지도 전쟁 때 시행하던 배급제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국력의 소진으로 종이호랑이가 된 영국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나, 주도국의 자리는 미국이 차지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 뒤 벌어진 제2차 중동전쟁에서도 미국과 소련의 힘에 눌려 수에즈 운하마저 이집트에 반환해야 했으며, 전 세계에 포진해 있던 식민지들이 연이어 독립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은 그렇게 몰락해 갔으며, 처칠이 90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이제 영국은 대국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처칠은 살아서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이라는 존칭을 받으며 추앙받았고, 죽어서는 ‘독일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나라를 지켜낸 전쟁 영웅’으로 세계적 위인이 되었지만, 그의 조국 영국은 세계지도국의 왕좌를 미국에 넘겨주고, 단 한 번도 옛 시대의 위상을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리처드 세일러 교수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과다한 비용을 치름으로써 결과적으로 승리해도 오히려 손해 보거나 위험에 빠지는 상황을 ‘승자의 저주’라 불렀다.
예를 들어 경매에서 많은 경쟁자가 등장했을 때 경쟁이 과열되면 터무니없는 가격에 낙찰되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 경우 승리는 그저 허울에 불과할 뿐 아무런 실익도 차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육도삼략(六韜三略)』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왕자의 위대한 군대는 아군은 물론 적군까지도 전혀 상처를 입히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라고 하여 상처 없는 승리가 진정한 승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무런 상처 없이 이길 자신이 있다면 모르되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가 아니라면 정공법은 최후까지 보류함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