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거나 뚜렷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도 겸손하지 못하면 평가절하를 면하기 어렵고, 겸손을 실천하려면 일정 부분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겸손은 가장 기초적이면서 실행이 쉽지 않은 덕목이다.
또한, 겸손한 사람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고, 상대의 경계감을 해제시키니, 실로 겸손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자신을 지키는 절대무기인 셈이다.
겸손은 평범한 인물을 비범하게 보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출중한 재능이나 특이한 조짐이 없었음에도 우연히 행한 단 한 번의 겸손이 원인이 되어 지존의 자리에 오른 특이한 인물이 조선 중기에 있었다. 하성군(河城君)이다.
하성군은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덕흥군은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으로 중종의 수많은 서자 중 하나에 불과했고, 하성군은 그런 덕흥군의 셋째였으므로 그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나, 세자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면서 하성군에게도 희미하나마 한줄기 기회가 찾아왔다.
명종(明宗)은 적자를 생산하여 왕위를 물려주는 게 어렵다고 판단하고, 여러 왕손 중에서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따르면 어느 날 명종이 왕손들을 교육하다가 “너희들의 머리가 큰지 작은지 알아보려 한다”며 그 자리에 있는 왕손들에게 자신의 익선관(翼善冠)을 써보라고 명했다.
왕손들은 별생각 없이 익선관을 썼으나, 유독 나이가 가장 어린 하성군만은 “이것이 어찌 상인(常人)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며 명종에게 공손히 되돌려 주었다.
이에 명종이 기특하게 생각하면서 “어린 것이 어쩌면 이렇게 예(禮)에 밝은가”라며 하성군에게 왕위를 전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때부터 명종은 하성군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고, 한윤명(韓胤明)・정지연(鄭芝衍)을 사부로 삼아 학업에 매진하도록 배려했다.
병약했던 명종은 1567년 6월 28일 즉위한 지 22년 되던 해 갑자기 쓰러져 병석에 누워지내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사경을 헤매던 명종에게 후계자 지명을 묻자 말을 하는 대신 겨우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켰다.
이준경은 ‘내전(內殿)’, 즉 중전(中殿)에게 물어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중전은 명종이 일찍부터 하성군을 후사로 정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이다.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직계 출신은 1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방계였는데, 선조는 직계 왕족이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선조의 즉위를 두고 사람들은 겸손이 왕을 만들었다고 했다.
중국에서도 겸손 하나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었다.
한(漢)나라를 일시 무너뜨리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운 후 15년 동안 황제 노릇을 했던 왕망(王莽)이다.
왕망은 기원전 45년 후작(侯爵)의 가문인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한(前漢) 제12대 황제인 성제(成帝)는 주색에 빠져 지내며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은 탓에 외척이 조정을 좌우하였다.
특히 성제의 어머니인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일곱 동생은 모두가 후작이 되어 권세를 누렸으며, 그중 왕망의 백부(伯父)인 왕봉(王鳳)은 대사마(大司馬)와 대장군을 겸하여 사실상 황제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왕봉의 형제들과 조카들은 하나같이 사치가 심하고 교만함이 극에 이르렀으나, 왕망만은 외척으로 행세하지 않고 외롭고 가난하게 지냈는데, 이를 기특하고 애처롭게 여긴 왕망의 고모 효원황후는 왕망과 그의 어머니를 궁으로 들어와 살도록 배려하였다.
왕망은 총명하고 검소했으며, 특히 그 태도가 공손하여 평판이 좋았다.
한번은 왕봉이 병석에 누웠을 때 왕망은 한 달이 넘도록 병시중을 들면서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며, 약을 직접 달이고 맛을 보는 등 정성을 다했다.
이에 감동한 왕봉은 조카인 성제와 누이인 효원황후에게 왕망을 잘 돌봐주라는 유언을 하였고, 그 덕에 왕망은 여러 차례 승진을 거쳐 시중(侍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중이 되고서도 겸손을 잃지 않고 매사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니, 대신들은 앞을 다투어 왕망을 대사마(大司馬)로 추천했고, 왕망은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후에도 왕망은 더욱 몸을 낮추고, 흉년이 들면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 인덕을 베푸니, 왕망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황제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왕망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세월이 흘러 성제가 죽고, 애제(哀帝)가 그 뒤를 이었으나, 머지않아 병사하고, 9세에 불과한 평제(平帝)가 즉위하면서 조정의 모든 권한이 왕망에게 집중되었다.
때가 왔다고 판단한 왕망은 평제를 살해하고, 서기 8년 ‘신(新)’을 세운 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니,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는 이렇게 210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왕망은 평생 검소함을 몸에 지니고 겸손으로 인망을 얻어 황제가 되었으나, 정작 황제에 오른 이후에는 백성의 재물을 탐하고 겸손의 자리에 오만을 채우는 등 이전과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다.
나라의 모든 토지를 왕령으로 흡수하고, 강제노역과 각종 세금을 창설하여 백성들을 핍박하였으며, 빈번한 전쟁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무거운 조세와 부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견디다 못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몰락한 한(漢)나라 황족들도 경시제(更始帝)를 추대하며 왕망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망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경시제와 맞붙었으나, 곤양전투(昆陽戰鬪)에서 패해 도망치다가 배신한 부하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머리는 잘려져 효수되었고, 몸통은 공을 세우려고 몰려든 병사들에 의해 갈가리 찢어졌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고, 대대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던 그의 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왕망은 위장된 겸손으로 황제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겸손이 자신을 지키는 수호신임을 죽는 날까지 알지 못했다.
실로 겸손은 평범한 인물을 왕으로도 만들고 그 자리를 빼앗기도 하니. 겸손이야말로 인간이 가지는 덕목 중 가장 위력적이라 할 만하다.
겸손은 자신을 반기는 사람에게 종종 영광을 안겨주지만, 자신을 멀리하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시련을 안겨준다.
처음에는 공이 많아 주군(主君)에게 중히 여겨졌으나, 몸이 높아진 이후에는 오만함이 극에 달하여 말년의 삶이 곱지 못했던 인물이 있었다.
조선 초 이방원(李芳遠) 옹립에 결정적 공을 세우고, 후일 병조판서를 지냈던 이숙번(李叔蕃)이다.
이숙번은 1373년(공민왕 22년) 문하시중을 지낸 이경(李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리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1393년(태조 2년) 2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문신임에도 궁술과 기마에 능하여 무신을 능가할 정도였다.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의 주선으로 이방원을 만났을 때 자신을 돕겠냐는 이방원에게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이방원이 흡족해했다고 한다.
1398년 지안산군사로 있을 무렵 ‘제1차 왕자의 난’ 때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세자 방석(芳碩)과 그의 형 방번(芳蕃)을 살해하고,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 개국공신을 제거하는 등 이방원의 정권 장악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400년(정종 2년) 좌부승지로 재직 중 태조의 4남 방간(芳幹)이 이방원의 세력을 꺾기 위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고, 정종(定宗)의 양위와 이방원의 즉위에도 앞장서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안성군(安城君)에 봉군되었다.
이숙번은 자신의 공이 크다는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위세 또한 대단했는데, 드나드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돈의문을 막고, 상왕인 정종(定宗)이 거처하는 인덕궁 쪽으로 문을 내게 할 정도였다.
태종은 이숙번의 패악을 보고받고도 그의 공을 잊지 못해 천성이 거칠어 그런 것이라며 감싸주곤 하였으나, 거만함이 태종 자신에게 미치자 태도를 바꾸었다.
가뭄이 극심해 태종이 신하들과 수시로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음에도 병을 핑계로 여러 달 동안 입궐하지 않은 것이다.
태종이 진노하여 “이 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그동안 태종의 눈치를 보며 잠자코 있던 신료들이 이숙번의 무례와 불충을 고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사태가 심각함을 감지한 이숙번은 사직을 표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례를 수습하려 했으나, 태종은 이숙번의 관작과 공신녹권을 박탈하고, 전 재산을 몰수한 후 함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태종은 세종(世宗)에게 자신이 죽은 후라도 이숙번의 유배를 절대 풀어주지 말라고 당부하였고, 세종은 부왕의 뜻을 따랐다.
후일 세종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숙번이 개국 초의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잠시 유배를 풀고 궁궐로 불러들여 편찬에 참여시키기도 했으나, 편찬이 끝난 뒤 다시 유배지로 보냈으며, 그로부터 2년 뒤 그곳에서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한 개인이 겸손하면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것에 그치나, 일국의 지도자가 공적으로 겸손하면 국가의 품격을 높이게 된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임에도 공적 행사에서 몸을 낮추는 단 한 번의 처신으로 주변국의 신뢰를 얻고, 분열된 나라를 통일로 이끈 인물이 있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이다.
빌리 브란트는 1913년 독일 북부도시 뤼벡에서 백화점 출납원으로 일을 하던 미혼의 어머니 마르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생계가 곤란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외할아버지인 루트비히에게 맡겼는데, 루트비히도 친 외할아버지는 아니었다.
마르타도 사생아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마르타의 어머니는 마르타를 기르고 있는 상태에서 루트비히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불우했던 빌리 브란트의 가정사는 후일 반대 정파의 공격 대상으로 이용되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럴 때마다 그를 옹호하는 정치적 동지들을 얻을 수 있었다.
빌리 브란트는 노동자 출신이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17세에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고, 이후 더 급진적인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SAP)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본격적인 정치적 행보를 시작하였다.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조선소 노동자로 취업한 후에도 활발하게 정당 활동을 하였으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탄압을 받게 되자 20세에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종전 후 서베를린에 정착한 빌리 브란트는 1957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옹호한 정치가로 명성을 쌓아갔다.
당시 서독 총리인 기독교 민주당 소속의 아데나워는 동독을 국가로 보지 않고, 동독과 국교를 맺은 나라와 외교를 단절하는 봉쇄정책으로 일관했는데, 빌리 브란트는 이런 정책이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1969년 10월 서독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서유럽과 동유럽을 아우르는 하나의 유럽을 만들 때 비로소 독일 통일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동・서 유럽의 반목과 적대감을 해소하는 이른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냉전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던 서방국가들은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구심을 가졌고, 서독 국민조차 그의 행보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를 일약 세계적 인물로 만든 것은 낮은 자세를 보인 한 장의 사진이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방문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유대인 위령탑에서 무릎 꿇고 참회하는 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된 것이다.
본인 역시 나치의 피해자였음에도 독일국민을 대표하여 나치의 희생자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그의 모습은 그동안의 행보가 화해를 위한 가식 없는 진심이었음을 입증시켰고,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인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이후 동・서 유럽 모두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지지하는 대열에 섰고, 냉전체제는 급격히 화해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화해정책은 총리로 재임했던 1974년까지 「베를린협정」 체결,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동유럽 국가들과의 국교 정상화로 이어졌고, 동유럽으로 수출의 길을 여는 등 독일의 경제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빌리 브란트는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종종 모호한 태도를 보이거나 결정을 연기하는 일이 많아 ‘햄릿’ 또는 ‘커브 길만 나타나면 차를 조심스럽게 모는 노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그는 과거 히틀러의 독단성과 급진성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다소 늦더라도 대화와 조정을 통해 모두가 만족하는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강국의 총리라는 자존심을 꺾고, 약소국을 방문하여 희생자의 영령 앞에 무릎을 꿇었던 그의 겸손이 있었기에 독일은 영구분단을 마감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굴기자능처중 호승자필우적(屈己者能處重 好勝者必遇敵)’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굽히는 사람은 중요한 지위에 오를 수 있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적을 만난다는 뜻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산타야나는 “사람의 유일한 위엄은 스스로 낮추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겸손한 사람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는 것을 보지 못했고, 알량한 지위로 위세를 부리는 사람치고 마지막이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다.
단언컨대 겸손을 얻으면 흥할 것이요, 겸손을 잃으면 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