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야 온전할 수 있다

by 노을 강변에서


『장자(莊子)』에 ‘직목선벌(直木先伐)’이라는 말이 있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베어진다는 뜻으로 매사에 융통성 없이 곧기만 하면 배척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직여현사도변(直如絃死道邊)’이라는 말도 있다.


곧기가 활시위와 같으면 길가에서 죽는다는 뜻으로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성정의 꼿꼿함을 경계하는 옛말이 많은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성격이 직선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인물은 대체로 세상살이에 어려움을 겪는다.


더러는 의로운 인물로 평가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고집 센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좋게 말하면 ‘소신’이요 나쁘게 말하면 ‘아집’인 셈인데, 때론 이런 인물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그들의 앞날에는 영광의 꽃길보다 고난의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다.


『한서(漢書)』에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다는 뜻으로 삶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나,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지조를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소무(蘇武)는 한무제(漢武帝)의 사신으로 흉노에 갔다가 그 나라의 내분에 휘말려 억류되는 처지가 되었다.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는 소무의 인물됨에 반하여 중용할 것을 내비치며 여러 차례 귀순을 권했으나, 소무는 한사코 거부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선우는 소무를 북해 근방의 한 섬으로 추방했고, 소무는 그곳에서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면서도 귀순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익은 인물이 소무를 찾아왔다.


소무가 사신으로 떠난 이듬해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참패하고 투항한 한(漢)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었다.


이릉은 자신의 투항이 부끄러워 감히 소무를 만나지 못하다가 선우의 명으로 부득이 소무를 찾아 “자네가 이렇게 절조를 지킨다고 알아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정말 덧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고 있는가”라며 간곡히 설득했으나, 소무는 끝내 귀순을 거부했다.


19년이 지나 두 나라가 화친한 후에야 소무는 간신히 귀양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재혼하였으며,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길 없었다.


귀순을 거부하고 끝내 절의를 지켰던 소무는 높은 기개를 역사에 남겼으나, 일생의 대부분을 고통 속에 보내고, 가정마저 풍비박산되는 깊은 슬픔을 겪었던 반면, 절의를 꺾은 이릉은 변절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으나, 선우의 사위가 되어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유연함이 처신에 유리함은 분명하지만, 거짓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데에서도 유연함은 힘을 발한다.


평생 바른 것만 추구하는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모함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일단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한 후 진실을 밝혀 자신을 지켜낸 지혜로운 인물이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재상을 지내며 정치를 쇄신하여 이른바 ‘무주(武周)의 치(治)’를 이끈 적인걸(狄仁傑)이다.


적인걸은 과거 급제 후 당고종(唐高宗) 때 조정에 발탁되어 사법기관 고위관리인 대리승(大理丞)으로 있었는데, 강직한 성품에 매사 공정하여 1만 7000건을 재판하면서도 억울한 자가 한 명도 생기지 않아 명판관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주자사(豫州刺使)로 있을 때도 무고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2천 명을 구제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적인걸의 뛰어난 인품과 유능함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하여 승진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당시 당(唐)나라는 고종(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가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고치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통치하던 때였다.


한번은 간신 내준신(来俊臣)의 모함을 받아 반역죄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게 되었는데, 내준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건을 날조하고, 갖가지 가혹한 형구로 자백을 받아 내는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적인걸은 고문 끝에 목숨을 허망하게 잃는 것보다 일단 죄를 인정하여 목숨을 구한 후 진실을 밝히자는 생각으로 모반죄를 거짓으로 자백했다.


꼿꼿한 성정의 적인걸이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리라 여겼던 내준신은 내심 의아했지만, 고문할 이유가 사라져 일단 옥에 가두었다.


적인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혈서를 가족에게 전했고, 아들은 그 혈서를 측천무후에게 전했으며, 측천무후는 혈서를 읽고 적인걸을 직접 심문하기로 했다.


적인걸은 측천무후에게 “소신은 절대 역모를 꾀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모를 자백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죽어 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폐하를 뵙고 무고함을 아뢸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호소하였고, 전후 사정을 살펴본 측천무후는 적인걸이 내준신의 모함을 받았음을 알고 석방과 동시에 재상으로 복직시켰다.


적인걸은 죽는 날까지 두려움 없이 측천무후에게 직간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웠고, 민생을 안정시켜 백성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가 추천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당(唐)의 중흥에 힘써 장간지(張柬之)・환언범(桓彥范)은 705년 측천무후를 압박하여 당나라가 부활할 수 있도록 하였고, 요숭(姚崇)은 현종(玄宗) 시대 당(唐)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적인걸이 만년에 이르자 측천무후는 그의 이름 대신 존경하는 뜻으로 ‘국로(國老)’라고 불렀으며, 그가 죽자 비통해하며 사흘이나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마다 적인걸을 생각하며 “하늘은 무엇이 급하여 국로를 그렇게 일찍 데려갔단 말인가”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만약 적인걸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버텼다면 누명을 벗는 것은 고사하고, 고문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과 더불어 반역자의 오명만을 남겼겠지만, 자존심을 꺾고 몸을 굽히는 유연성을 발휘한 덕에 작게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건지고, 크게는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 세운 충신으로 남게 되었다.




상대가 강할 때는 머리를 숙이고 굴종의 모습을 보이다가 때가 왔을 때 큰 걸음으로 나아가 마침내 뜻을 이룬 보기 드문 영웅이 일본 전국시대에 있었다. 기다림과 인내의 대명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다.


중국에 춘추전국시대가 있었고 우리나라에 삼국시대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전국시대가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는 ‘오닌의 난’을 계기로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까지 약 백 년 동안 이어진 하극상 전란의 시대로 일본인이 존경하는 인물 중 적어도 한 명은 포함된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동한 시대이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의 기초를 닦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을 완수하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메이지 유신까지 약 260년간 일본의 평화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이 세 명의 인물 중 일본의 기업인들이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상으로 꼽는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본의 패권을 쥔 인물임과 동시에 ‘인내의 귀재’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오카자키의 성주였던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의 명으로 여러 가문의 인질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등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인질에서 해방되어 성주가 된 이후에도 세력이 미약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는데, 노부나가의 강요로 아내와 맏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영지를 빼앗겼어도 반항하지 않았으며, 언젠가 자신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굴욕을 견디며 힘을 길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전국의 패권을 쥐었으며, 이어 벌어진 ‘오사카 전투’를 통해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키고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오다 노부나가는 “죽여 버린다”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게 만들겠다”고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시즈오카시 소재 도쿠가와 이에야스 박물관에 있는 이에야스 상


지금도 닛코 동조궁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음과 같은 유훈이 남아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머나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항상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은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곤궁했을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그 피해는 너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너 자신을 탓할 뿐 남을 탓하지 말라. 미치지 못함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부굴일인지하 필신만인지상(夫屈一人之下 必伸萬人之上)’이라는 말이 있다. 무릇 한 사람 아래에 굽히면 반드시 만 사람 위에 펼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온갖 굴욕을 참아내고 마침내 자신의 세상을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야말로 이 말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 할 만하다.




유연성의 부족은 필연적으로 신상에 해로움을 초래하는데, 중차대한 국가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하면 거국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음을 다음 사례가 알려주고 있다.


후한(後漢)의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반초(班超)는 처음에는 관아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말단 문관이었으나, “대장부로서 지략이 없다면 마땅히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워 봉후(封侯)의 자리를 얻어야지 어찌 붓과 벼루 사이에서 오래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무관으로 전직하였다.


이후 서역 근무를 자청하여 명제(明帝) 때 오랑캐 여러 나라를 복속시킨 공으로 서역 총독이 되었고, 주변의 이민족들을 온유한 방법으로 잘 다스려 그의 임기 내내 변방이 평온하였다.


세월이 흘러 소임을 모두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 반초는 성격이 급하고 고집이 센 인물로 소문난 임상(任尙)이 후임자라는 것을 알고 크게 걱정하였다.


임상의 성정대로 오랑캐들을 다스리면 많은 부작용이 발생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고심하던 반초는 업무인계서에 ‘수청즉무어 인찰즉무도(水淸則無魚 人察則無徒: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져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라는 문구를 써 놓았다.


업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문구를 본 임상은 자존심이 상했다. 업무를 인계하고 떠나면 그만이지 굳이 충고까지 남긴 것을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임상은 반초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 소신대로 서역을 다스렸고, 그 결과 반초에게 복속했던 50여 개의 주변 나라는 임상이 부임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아 연이어 반란을 일으켜 한의 지배에서 속속 벗어났으며, 그로 인해 서역도호부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유연함을 몰랐던 임상의 성정으로 영토는 축소되고 나라의 위신은 깎였으니, 결과만을 놓고 볼 때 임상은 반역한 것과 다름없었다.




유연한 처신이 몸을 지켜내듯 유연한 외교는 나라를 지켜낸다.


수 세기 동안 약소국의 처지에서 다소의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갈대와 같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덕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주권을 유지하며 번영을 누리는 특이한 나라가 있다. 유럽 발트해 연안에 있는 인구 500만의 핀란드이다.


핀란드는 12세기 스웨덴의 십자군에 점령되어 오랫동안 스웨덴의 속령으로 있다가 19세기에 러시아의 속령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때 겨우 독립국이 되었다.


img.jpg 스웨덴과 러시아에 끼어있는 핀란드(녹색 부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의 편에 서서 소련에 맞섰다가 10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영토 일부를 빼앗기는 협정을 강요당하기도 했으며, 냉전 시대에는 소련에 먹히지 않으려고 배알 없는 인간처럼 기꺼이 굴욕을 감수하였는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온 세계가 비난을 퍼부을 때도 침묵했고, 자국 출판업체가 소련의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의 작품을 출간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조차 했다.


국제사회는 지리적으로 스웨덴과 소련이라는 강국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택해야 했던 핀란드의 저자세 외교를 두고 ‘비굴한 나라’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세계적 문명 연구가이자 『총・균・쇠(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핀란드를 “타고난 유연성을 보여준 국가”라고 추켜세우고, “그런 처세 덕분에 핀란드는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고,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인프라와 첨단산업을 자랑하는 부유한 자유 민주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노자(老子)』에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다.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부연하고 있다.


“세상에 부드럽고 약하기로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으나,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능히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은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천하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이를 행하지는 못한다. 사람이 생겨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나,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굳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도 생겨날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또한,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인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위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자리 잡는다.”


이솝우화에도 강함과 부드러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갈대와 올리브나무 사이에 끈기와 힘을 두고 시비가 붙었다.


올리브나무는 갈대에게 힘이 없고 바람에 쉽게 굽힌다고 조롱하였으나, 갈대는 침묵만 지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세찬 바람이 불어와 갈대는 흔들리고 굽히면서 쉽게 바람을 이겨냈으나, 올리브나무는 바람에 맞서다가 그만 꺾이고 말았다.


노자(老子)에 ‘곡즉전(曲則全)’이라는 말이 있다.


굽어야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디언 속담에 “멀리 가려거든 곡선을 그리면서 가라”는 말도 있다.


애벌레가 앞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몸을 구부려야 하는 것처럼 굽히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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