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것으로 끝내고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은혜를 베풀고서 대가를 바라면 상거래를 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는 원수 만드는 법 중 하나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자주 독촉하라”고 했다. 보답을 바라는 은혜의 부작용을 일깨우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은혜를 준 것에 그치지 않고, 대가를 요구하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 목숨까지 잃는 어이없는 사건이 조선 초에 있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 홍윤성(洪允成)과 그의 숙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윤성은 1425년(세종 7년) 충청도 평택현에서 홍제년(洪齊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10년 이상 숙부의 보살핌을 받다가 출세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풍찬노숙(風餐露宿)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한강 변에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구명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으며, 후일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운도 따라주면서 예조판서・경상우도 절제사를 역임하고, 여진족 토벌의 공으로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조카의 출세 소식을 들은 홍윤성의 숙부는 과거 홍윤성을 길러준 은혜에 보답받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홍윤성을 찾아가 자식의 벼슬자리를 청탁했다.
홍윤성은 숙부의 은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논 스무 마지기를 바치면 생각해보겠노라 했다.
그 말을 들은 홍윤성의 숙부가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분노 어린 원망의 거친 말을 쏟아내자 홍윤성은 하인들을 시켜 숙부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후 앞마당에 매장했다.
남편의 흉사를 전해 들은 홍윤성의 숙모는 원통하기 짝이 없어 세조가 순행하는 길목 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리고 있다가 때마침 세조가 지나는 것을 보고 대성통곡했다.
세조는 홍윤성의 숙모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서 원한을 풀어주겠노라 약속하였으나, 공신이라는 이유로 홍윤성에게는 다소의 질책을 하는 데 그치고, 애꿎은 홍윤성의 몸종들만 도륙했다.
이밖에도 홍윤성은 수시로 패악을 부렸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해 말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매질을 가했고,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이 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살인마 정승’이라 불렀다.
홍윤성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던지, 세조는 모든 게 술 탓이라 여겨 금주령을 내렸는데, 홍윤성은 “신은 술이 없으면 죽습니다”라며 사정하여 이마저도 취소했다.
갈 곳 없는 어린 조카를 거두어 보살펴주었으면 훌륭한 일을 한 것이고, 그런 조카가 다행히 높은 벼슬까지 하게 되었으면 흐뭇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될 것을, 굳이 자신이 베푼 은혜에 보답을 바라다가 홍윤성의 숙부는 팔자에 없는 끔찍한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세대를 거쳐 쌓이고 쌓이면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옛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연한 기회에 베푼 사소한 은혜로 후일 자신의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해준 덕에 처형을 면한 안렴사(按廉使)김주(金湊)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방원(李芳遠)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하륜(河崙)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한 후 신돈(辛旽)과의 불화, 최영(崔瑩)의 요동 공격 반대 등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고,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되는 등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행실 또한 반듯하지 못해 예천군수로 좌천되어 있을 무렵 고을 기생 대부분과 관계하는 등 음탕함이 끝이 없어 평판이 좋지 않았으나, 안렴사 김주는 죄를 묻는 대신 그의 치적을 가장 우수한 것으로 조정에 보고하여 오히려 승진하도록 도와주었다.
후일 김주는 이방석(李芳碩)의 편에 있었다는 이유로 ‘1차 왕자의 난’ 때 체포되어 처형을 앞두고 있었는데, 남편의 옛일을 알게 된 그의 부인이 당시 실세였던 하륜이 타고 가는 말 앞에 엎드려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자 하륜은 옛 시절 김주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기억하고, 이방원에게 요청하여 죽음 직전에 있던 김주를 살려주었다.
자신이 당한 은혜와 치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은인에게는 반드시 보답하고, 원수에게는 철저히 복수했던 인물이 전국시대에 있었다.
진(秦)나라가 천하 통일을 위해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던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이자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범수(范睢)이다.
범수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출세에 뜻을 두고 제후에게 유세하여 관직을 얻으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수고(須賈)라는 위나라 중대부(中大夫)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어느 날 범수는 수고를 수행하여 제(齊)나라에 갔는데, 제나라 왕이 말 잘하고 재능 있는 범수를 보고는 황금과 술을 상으로 내리며 관심을 보였다.
범수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었는데, 이를 목격한 사람이 수고에게 보고했고, 수고는 범수가 제나라와 내통하여 나라의 기밀을 팔아넘겼다고 오해했다.
수고는 범수에게 술은 받되 황금은 되돌려 주라 명령했고, 범수 또한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황금을 되돌려 주었음에도 수고는 귀국한 후 위나라 재상인 위제(魏齊)에게 보고했다.
범수는 반역죄로 몰려 뼈가 부서지고 살이 터지는 모진 매질을 당하였는데, 위제는 의식이 없는 범수가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변소에 버리도록 하여 관리들이 그 몸에 오줌을 누도록 했다.
죽은 사람처럼 행세하여 간신히 살아난 범수는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위나라를 탈출할 수 있었고, 왕계(王稽)의 추천으로 진(秦)나라 재상이 되었다.
이후 범수는 정안평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왕계를 태수로 임명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은혜에 몇 배로 보답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없는 죄를 씌우고 모진 형벌을 가한 위나라 대신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옛 주인이던 수고가 위나라 사신으로 진나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불렀다.
수고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범수가 전국시대 최강국인 진나라의 재상이 된 것을 알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고 지난 일을 사죄했으나, 범수는 “위나라 왕에게 전하라. 즉시 위제의 머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위나라 수도인 대량성을 허물고 대량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며 위협했다.
그러면서 타국의 사신들에게는 산해진미를 대접하면서 수고에게는 짚과 콩을 접시에 담아주며 말이 여물을 먹는 것처럼 먹도록 하여 원한을 풀었다.
위제는 거듭되는 진나라의 위협에 조(趙)나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도 인기척만 나면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불안한 삶을 살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다.
범수는 자신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해 준 사람에게도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았고, 눈 한 번 흘긴 사람에게도 반드시 원한을 갚았다고 한다.
『경행록(景行錄)』에 ‘은의광시 인생하처불상봉 수원막결 노봉협처난회피(恩義廣施 人生何處不相逢 讐怨莫結 路逢狹處難回避: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살다 보면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좁은 길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라는 섬뜩한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감에 필요한 지혜를 알려주는 다양한 처세법이 횡행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이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보답을 위해 열성을 다하지는 않지만, 원한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잊지 않고 복수를 꿈꾼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게 된다면 그런 은혜는 베풀지 않는 게 좋다.
『이정전서(二程全書)』에 ‘명경위추부지원(明鏡爲醜婦之寃)’이라는 말이 있다.
못생긴 여인은 맑은 거울을 원수로 삼는다는 뜻으로 사악한 사람이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오지(旬五志)』에 ‘차청차규(借廳借閨)’라는 말도 있다.
대청을 빌려주면 안방을 빌리려 든다는 뜻으로 남의 호의를 이용하여 차츰차츰 그의 권리를 침범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원한 살 잘못을 하지 않아도, 심지어 은혜만을 베풀어도 화를 당할 수 있는데, 원한 살 처신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