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다면 지금 당장 중단하라

by 노을 강변에서

치욕을 당하거나 부당한 불이익을 당하면 분노가 솟구치고, 상처 입은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으며, 때론 설욕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복만은 최후까지 자제함이 옳다.


보복은 어떤 경우라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심대한 후유증만을 남긴다. 개인적 보복이 몸을 위태롭게 하고, 국가적 보복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그렇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 춘추시대에 두 나라의 제후들이 상호 복수를 이어가다가 두 사람 모두 파멸을 맞은 괴이한 사건이 있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은 “임금이 반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져도 모를 미인”을 뜻하고, 통상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를 꼽기도 하지만, 복숭아꽃처럼 아름답다 해서 ‘도화부인’이라고도 불리는 또 다른 미인 규씨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대국인 초(楚)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식(息)이라는 나라의 제후 아내로 천하절색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기원전 684년 규씨 부인이 친정인 진(陳)나라로 가는 길에 채(蔡)나라 제후의 아내인 언니를 만나보고자 채나라를 방문했는데, 규씨 부인의 미모에 반한 채나라 제후가 음탕한 말과 행동으로 그녀를 희롱했다.


이를 수치로 여긴 규씨 부인은 친정에서 돌아와 남편인 식나라 제후에게 형부인 채나라 제후의 음행을 폭로했고, 분노한 식나라 제후는 복수를 다짐하고 이웃 강국 초나라를 방문하여 거나한 조공을 바치면서 초문왕(楚文王)이 채나라를 공격하면 자신도 초나라를 돕겠노라 하였다.


오래전부터 채나라를 정복하고 싶었던 초문왕은 좋은 기회라 여기고 대군으로 채나라를 공격하여 채나라 제후를 사로잡았다.


초나라로 끌려간 채나라 제후는 처형을 간신히 면하고 살아났는데,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이 식나라 제후의 계략에 따른 것임을 알고 이상한 방식의 복수를 꿈꾸었다.


식나라 제후는 초문왕에게 규씨 부인이 천하절색임을 주지시킨 후 천하제일의 여자는 천하제일의 사내가 품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하면서 초문왕에게 규씨 부인을 취하라고 부추겼다.


호색한이었던 초문왕은 규씨 부인을 얻기 위해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식나라를 방문하여 규씨 부인이 자신에게 술을 따르지 않은 것을 트집 잡아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나라 제후를 궁벽한 시골로 추방한 후 규씨 부인을 아내로 삼았다.


아름다운 아내를 잃고 일국의 제후에서 촌부로 전락한 식나라 제후는 울분 속에 죽음 같은 삶을 겨우 연명하다가 긴 한숨 속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규씨 부인은 초나라로 간 후 초문왕의 아들을 둘씩이나 낳았음에도 웃기는커녕 말조차 하지 않았다. 초문왕이 규씨 부인에게 이유를 묻자,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두 남자를 섬겼으니, 무슨 면목으로 입을 열고 말할 수 있느냐고 했다.


초문왕은 모든 게 채나라 제후의 음탕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서 규씨 부인의 애통함을 풀어주겠다는 이유로 군사를 몰아 채나라를 공격했다.


채나라 제후는 초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웃옷을 벗은 채 엎드려 굴욕적인 항복을 했고, 이후 초나라로 끌려가 죽는 날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포로의 신분으로 생을 마쳤다.


이 이야기는 미인을 아내로 얻으면 화를 입게 된다는 사례로 종종 언급되지만, 그 이면에는 빗나간 복수심이 자리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에서 전개되는 수많은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관도대전(官渡大戰)・적벽대전(赤壁大戰)・이릉대전(夷陵大戰)을 꼽는다.


관도대전은 조조(曹操)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당대 최고 군벌인 원소(袁紹)와 자웅을 겨루었던 전투였고, 적벽대전은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이 동맹하여 조조의 백만 대군을 격퇴한 전투였으며, 이릉대전은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關羽)의 복수를 위해 오(吳)나라를 쳤다가 대패한 전투였다.


유비가 치른 두 개의 큰 전투 중 적벽대전은 촉(蜀)과 오(吳)가 힘을 합쳐 위(魏)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삼국 정립의 계기를 만들고, 유비의 촉이 비로소 나라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최상의 결과를 낳았으나, 이릉대전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릉대전의 원인은 관우의 죽음이었다.


삼국의 요충지인 형주(荊州)를 지키던 관우가 오의 장수 여몽(呂蒙)에게 패해 전사하자 촉의 황제 유비는 관우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복수의 전쟁을 하고자 했다.


당시 제갈량(諸葛亮)을 비롯한 촉의 신하들은 “우리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라며 전쟁의 불가함을 극렬히 간했으나, 복수심에 사로잡힌 유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끝내 유비는 70만 대군을 끌어모아 오나라로 향했다.


유비의 공격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던 오나라 장수 육손(陸遜)은 수차례 작은 전투에서 계획된 패배를 하며 유비의 자만심을 길러준 후 화공(火攻)으로 총공세를 가하여 촉군을 대파했고, 패주하던 유비는 변방의 백제성에서 한숨 속에 병사했다.


무릇 군주는 국가를 튼튼히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함에도 유비는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작게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크게는 나라를 기울게 하였다.


이와는 달리 모욕을 당하고도 참아내어 자신의 몸을 보존하였음은 물론 후일 이름을 크게 떨치는 영웅이 되었으며, 자신에게 모욕을 가한 자를 찾아내고도 복수 대신 아량을 베풀었던 큰 인물이 있었다.


‘과하지욕(胯下之辱)’의 유래를 만든 한(漢)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이다.


한신은 진(秦)나라 때 사람으로 과거 초(楚)나라 지방인 회음현(淮陰縣)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했으며, 품행이 바르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못하여 누군가에 빌붙어 음식을 얻어먹는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한신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물기 없는 높은 곳에 시신을 매장하였는데, 그 묘터가 마치 1만여 가(家)를 굽어보는 형세였다고 한다.


한신은 친분이 있는 정장(亭長)의 집에서 한동안 밥을 얻어먹고 지냈는데, 정장의 아내는 그런 한신이 얄미워 남편에게는 새벽밥을 지어 먹이고, 아침을 먹으러 온 한신에게는 밥을 주지 않았다.


때가 되어도 밥을 차리지 않는 사정을 알게 된 한신은 그 집에 발길을 끊고, 이후 낚시터를 전전하며 밥을 빌어먹었다.


이를 딱하게 본 표모(漂母)가 한신에게 밥을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한신이 고마운 마음에 “베풀어준 은덕은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자 표모는 성을 내며 “대장부가 스스로 살아가지 못해 내가 불쌍히 여겨 밥을 준 것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라며 나무라듯 말했다.


한신은 늘 칼을 차고 다녔는데, 한 번은 동네 건달이 “너는 늘 칼을 차고 다니지만, 사실은 겁쟁이가 아니냐? 네놈에게 사람을 죽일 만한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 봐라. 그러지 못하겠다면 내 가랑이 밑을 기어가라!”며 시비를 걸었다.


한신은 건달과 그의 패거리를 잠시 바라보다 결국 건달의 다리 사이로 기어갔는데, 이 사건은 두고두고 한신을 괴롭혔다.


한신이 항우(項羽)를 찾았을 때 항우는 천하에 비겁한 놈이라며 한신을 무시했고, 유방(劉邦)조차 처음에는 ‘과하지욕’의 소문을 듣고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소하(蕭何)의 추천으로 대장군에 임명되어 유방을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고, 자신은 초(楚)나라 왕이 되었다.


한신은 과거 자신에게 밥을 주었던 빨래터 아낙네를 찾아 천금을 주어 은혜를 갚았고, 옛 시절 자신에게 모욕을 안긴 건달도 찾아냈다.


벌벌 떨며 한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건달에게 한신은 벌을 내리는 대신 벼슬을 내리고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가 내게 망신을 줄 때 나에게 이 자를 죽일 힘이 없었겠소? 그때 모욕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았다면 나는 죄인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텐데,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은 덕에 여기까지 오를 수 있었소.”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 권력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권력을 잡은 세력은 힘을 잃은 이전 권력자에게 각종 혐의를 씌워 정치보복을 하는 것이 상례인데, 과거의 정적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화해의 손길을 내민 위대한 정치인이 있었다.


고질적인 종족 갈등과 흑백 갈등을 당대에 해결하고, 전 인류에게 화해의 정신을 전파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넬슨 만델라이다.


img.jpg 넬슨 만델라


만델라는 아프리카 코사족의 속담인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


독자적인 삶보다는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는 삶을 권장하는 이 가르침은 ‘진영논리(陣營論理)’에 갇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논리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화합의 철학을 담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전 세계 다이아몬드와 금 매장량의 50% 이상을 보유한 나라로 181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10년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서구의 거대 보석 채굴 기업들은 20세기 초반부터 경쟁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을 따라 대거 이주한 백인들은 현지 흑인 원주민을 노예로 부렸다.


흑인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백인들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낮은 임금을 받았으며, 전기・수도・교통・공공의료 등의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백인들은 이 같은 인종차별을 고착시키기 위해 흑인들에게는 어떤 교육도 제공하지 않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만델라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1918년 7월 18일 남아프리카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변호사의 꿈을 안고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 법학부에 입학 후 재학생 신분으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산하 청년동맹을 결성하여 백인 정권의 흑인차별정책 철폐를 요구하는 데 앞장섰다.


1950년 ANC 청년동맹 의장이 되었다가 1953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한 후 그해 12월 ANC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만델라는 애초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6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기를 난사하여 69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샤프빌 마을 사건을 계기로 비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비밀무장투쟁조직인 ‘민족의 창’을 결성하여 최초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듬해 에티오피아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요하네스버그의 은신처로 돌아가던 중 체포되어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1990년 석방될 때까지 무려 2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만델라는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흑인 죄수들을 교육하고, 흑인 인권을 위해 단식하는 등 옥중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런 활동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만델라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요구가 고조되자 클레르크 정부는 1990년 2월 22일 마지못해 만델라를 석방하였고, 만델라는 그해 ANC 의장으로 취임했다.


3년 후 만델라는 자신을 탄압했던 클레르크 총리와 손잡고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민주헌법을 제정하여 클레르크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으며, 1994년 4월 민주적 보통・평등선거로 선출된 남아프리카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되자 지난 정권에서 흑인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닥쳐올 정치보복에 몸을 떨었으나,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


먼저 인종차별정책의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고,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위원회는 인종차별에 항거한 흑인들을 총살과 화형 등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들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과감하게 사면하였고, 피해자를 발굴하여 비석을 세우고 추모 사업을 추진하여 그들의 노력과 헌신이 기억되도록 했다.


이렇게 만델라는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의 역사를 완전히 종식하고, 1999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화와 국민 통합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정계를 은퇴한 이후에도 세계 인권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다 2013년 12월 5일 전 세계인의 추도 속에 영광의 생을 마쳤다.


만약 그가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고 정치보복을 했다면 지금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 간 분쟁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며,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권 후진국이 되었을 것이다.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서 보석 같은 청・장년 시절을 보내며 복수의 칼을 갈았을 법도 했건만, 그는 자신을 핍박했던 원수 같은 정적들에게 보복의 칼날을 들이미는 대신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의 대열에 합류시켰다.


오늘날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부(國父)로 존경받고 있으며,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자 평화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후유증 없는 통쾌한 복수는 없다.


복수는 반드시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교의 고수들은 심사가 뒤틀려도 내색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하는데, 그런 태도는 비난자를 당혹스럽게 하고, 세인들로부터 ‘대인(大人)’이라는 찬사를 받게 한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는 복수의 방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자신의 적에게 무엇으로 복수를 해야 할까? 가능하면 많은 선을 베풀도록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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