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의 훈련 만으로 고통의 절반을 덜 수 있다

by 노을 강변에서

세상사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있을까만, 기억만큼 통제할 수 없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졸음은 쫓을수록 몰려오고, 자려고 애쓸수록 정신은 또렷해지듯 붙잡고 싶은 기억은 저절로 사라지고, 떼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끝내 뇌리에 남아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긁고 흔들어 댄다.


지난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용어인 ‘트라우마(trauma)’는 의학적으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또는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의미한다.


심리학자들은 기억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즉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나쁜 기억을 쉽게 떨쳐버리는 방법을 터득하면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1987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의미 있는 실험이 있었다.


대니얼 웨그너 교수는 대학생 참가자들을 A・B 두 그룹으로 나눈 후 A그룹에는 5분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되 ‘흰곰’을 생각하라고 요청했고, B그룹에는 같은 행동을 하되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그룹 모두에게 ‘흰곰’이 생각날 때마다 벨을 누르도록 했는데, 실험결과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B그룹이 오히려 벨을 더 많이 누른 것으로 나타났다.


웨그너 교수는 이런 현상을 ‘사고 억제의 반동 효과’라고 명명하고, 잊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생각나는 이른바 ‘흰곰 효과’를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법은 ‘흰곰’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흰곰’이 떠오르지 않도록 하려면 ‘흰곰’을 뇌리에서 떨쳐버리려 하지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생각하는 시간 자체를 미루는 것이다.


예컨대 ‘한 시간 후에 생각하자’라고 뇌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미국의 기업인 겸 자선사업가인 앤드루 카네기는 “근심을 잊지 못하는 습성에서 벗어나라. 또 어떤 손실을 회복하려고도 애쓰지 말라. 도박꾼이 본전을 찾으려다가 더 큰 손해를 보듯 근심을 잊지 못하는 습성은 점점 회복하기 어려운 구덩이로 빠지게 만든다”고 하여 지난 잘못을 되새기는 것의 부작용을 일깨워주고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평론가이자 역사가인 앙드레 모루아 역시 “망각 없이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과거를 잘 잊는 것이 행복의 비결임을 강조하고 있다.


브라질의 신경생물학자인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는 자신의 저서 『망각의 기술』에서 “망각은 인간의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은 살기 위해 기억하고, 살기 위해 망각한다”고 했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오늘의 삶이 고통받고 있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그런 기억들을 뇌리에서 남김없이 소각해 버려야 한다.


‘레테’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망각의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저승에는 다섯 개의 강이 있고, 가장 마지막에 그녀의 이름을 딴 ‘레테의 강’이 흐르는데, 죽어서 저승에 가는 망자들은 빠짐없이 이 강물을 마셔야 하며, 이 강물을 마시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고 한다.


캡처.PNG 1880년 존 로담 스펜서 스탠호프가 그린 레테의 강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인간이 다시 새로운 육신을 얻어 환생할 때에는 레테의 강물을 마셔야 지난 생의 기억을 잊은 채 이승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고, 고대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과거를 모두 잊은 채 새 육신을 얻어 다시 태어나는 영혼들의 행로를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과거를 잊지 못하고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망각은 그저 지난 일을 잊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망각은 창조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본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도야마 시게히코는 자신의 저서 『망각의 힘』에서 ‘효율적 망각’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배설작용과 같아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배설이 전제되어야 함을 근거로 적당한 망각이 있어야만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망각이야말로 창조적 사고를 위한 필수적 능력이라고 보았다.


슬픈 과거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다면 잊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시간에 맡겨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자인 키케로는 “시간이 가볍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지 않는 슬픔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라는 신비로운 마술사를 찾아가라고 권유하고 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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