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든 넘치면 탈이 나듯 말이 많아도 좋을 게 없다.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는 것이라면 문제 될 리 없겠지만, 살가운 사이가 아님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대면 상대에게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단순히 말이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어떤 성과를 자신의 것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당시에는 호평받고 있으니 과시하고픈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세상이 변하면 언제든 혹평으로 돌아설 수 있고, 그 경우 업적은 적폐가 되어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과실은 소유하되 그것에 따르는 명성만큼은 타인에게 양보한다. 이름을 드러내 얻어지는 허명(虛名)보다 이름을 감추어 얻는 안전이 신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조언을 구할 때도 필요 이상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사가 아랫사람의 의견을 듣기에 앞서 자기 생각을 먼저 밝히면 다양한 의견을 구할 수 없는 것이 그렇다.
한비자(韓非子)는 “군주가 신하들의 의견을 듣기 전에 자기 의사를 미리 말해버리면 신하는 군주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그 뜻에 영합하는 말만 하게 된다”고 했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도 말이 많으면 조력자보다 더 많은 훼방꾼을 만나게 되며, 곤경에 처한 경우에도 주변에 사정을 털어놓으면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가장 말을 아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단연코 술을 즐기는 사람이다.
술에 취하면 긴장감이 풀어져 평소 품었던 생각이 스스럼없이 말로 나타나는데, 대부분은 이때 사달이 난다. 물론 편한 사이라면 별 탈 없겠으나, 상대가 자신의 생살권을 쥐고 있는 절대 권력자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실제 왕이 베푼 연회에서 술에 취해 호기롭게 내뱉은 몇 마디 말로 공신 자격을 박탈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인물이 조선 초에 있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이었던 양정(楊汀)이다.
양정은 일찍이 무예가 뛰어나 내금위의 무사로 발탁되었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거사를 위해 한창 무사를 모으고 있을 무렵 한명회(韓明澮)의 천거로 수양대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계유정난 때 군사를 이끌고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수양대군이 즉위하면서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양정은 공조판서・지중추원사 등 중앙관직을 지내기도 했으나, 다른 공신들과 달리 함길도 도체찰사・평안도 도체찰사 등 변방 근무가 많아 세조(世祖)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깊었다.
세조는 실록에서 ‘술자리’라는 말이 무려 467건이나 검색될 정도로 연회를 자주 베풀어 신하들과 술잔을 나누었는데, 본인이 술을 즐기기도 했지만, 신하들의 본심을 알아내는 방법으로도 활용했다.
1466년 6월 세조는 평안도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양정에게도 연회를 베풀어주며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 했다. 크게 취한 양정은 “상감께서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십니까”라며 선위(禪位)를 권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조는 격분하여 즉석에서 승지를 불러 “옥쇄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며 언성을 높였는데, 승지들이 세조의 명을 받지 않고 주저하자 양정이 “임금의 명령이 이와 같은데, 승지들은 어째서 대보(大寶)를 가져오지 않는가?”라며 제 목숨을 재촉하였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이 말리면서 세조의 양위 소동은 수습되었으나, 양정은 말을 함부로 했다는 이유로 사간원과 승정원의 탄핵을 받아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되고, 그의 자식들은 관노(官奴)가 되었다.
술에 취한 신하에게 종종 무례를 경험했던 세조는 이를 경계하려는 의도에선지 색다른 처신을 하기도 했는데, 이조참의로 있던 어효첨(魚孝瞻)을 이조판서로 승진시킨 것이 그랬다.
이조참의는 정삼품 벼슬로 위로는 이조참판과 이조판서가 있는데, 음주 습관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이조참판을 건너뛰어 바로 이조판서로 임명한 것이다.
세조는 어효첨을 이조판서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어효첨은 술에 크게 취해도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승진의 이유로 들었다.
이런 사례들이 쌓이고 쌓여 ‘주중불언 진군자(酒中不言 眞君子:술에 취해도 말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군자이다)’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생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말과 다를 게 없으나,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급력과 영속성을 지니므로 높은 수준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국가 고위직의 하마평에 올랐던 인물들이 과거 자신이 쓴 글에 발목이 잡혀 낙마하는 일이 빈번한 것도 글의 부정적 위력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적절히 활용하면 자신의 변호는 물론 위상을 드높일 수도 있는데, 글을 잘 남겨 자신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고, 후일 충의지사(忠義之士)가 된 인물이 있다.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柳成龍)이다.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 때 글을 깨우칠 정도로 천재였으며, 일찍이 관료의 꿈을 꾸고 학업에 정진했다.
21세 때 이황(李滉)의 제자로 들어가 학업을 닦았는데, 한번 책을 읽으면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 이황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관악산 암자에서 과거시험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천재 청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의 한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홀로 맹자(孟子)를 읽는 류성룡의 담력을 시험했는데, 조금도 동요치 않고 글을 읽어 승려는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류성룡은 30세에 병조좌랑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52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영의정에 오를 정도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한때 왜군과의 화친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재상으로서 국정을 원만히 총괄하여 조정을 안정시켰고, 면천법(免賤法)과 속오법(束伍法)을 실시하는 등 군사제도를 개혁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을 천거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긴 난세의 명신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지내는 동안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행적을 다룬 전쟁일지인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는데, 임진왜란에 관한 변변한 기록이 없는 오늘날 징비록은 그 당시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가 되었다.
오랜 전란과 전후 수습과정에서 자신을 향한 밑도 끝도 없는 음모와 모함에 진저리가 났던 그는 글을 통해 자기 처신의 정당성과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심을 담아내려 했고, 그런 의도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그의 사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류성룡은 국난을 극복한 충신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그런 평가는 징비록의 내용을 뒤집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료가 새롭게 발굴되지 않는 한 변함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고, 실천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을 실속 없다고 여기지만, 말로써 국가 지도자가 되었고, 말을 통해 문명국의 국민을 자기 세계로 완벽히 끌어들인 연설의 달인이 있었다. 독일 나치의 총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이다.
독일의 나치당은 12석의 아홉 번째 정당에서 4년 만에 230석의 제1정당으로 도약했는데, 세계 정치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기적 같은 결과는 히틀러라는 한 정치인의 현란한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일본 작가 다카다 히로유키는 히틀러가 1919년 10월 뮌헨 맥주 홀에서 행한 첫 번째 연설부터 1945년 1월 지하 벙커에서 행한 마지막 라디오 연설까지 총 25년간의 연설 전문을 분석하여 『히틀러 연설의 진실』을 출간하였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히틀러는 가장 쉬운 단어들로 핵심 내용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청중들에게 각인시켰고, 정신이 흐려지기 쉬운 오후나 저녁 시간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연설에 취하도록 했으며, 적절한 순간에 최적의 몸짓을 취하여 지휘자의 유려한 손끝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처럼 국민을 마력적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러한 히틀러의 신들린 연설은 천재적 순발력이 아니라, 치밀한 각본과 부단한 연습의 산물이었다. 히틀러는 연설을 시작하기 전 원고를 몇 번이나 암송하여 철자 하나 틀림없이 숙지하였고, 연설 중 역동적인 몸짓을 가미한 것도 충분한 예행연습을 거친 결과였다.
말은 간결할수록 힘을 가진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뛰어난 정치인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압축된 구호를 만들어 신선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대중들의 눈길을 흡수한다.
정치 신인에 불과하던 빌 클린턴은 ‘It's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를 선거 구호로 내세워 실업과 경기침체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던 현직 대통령 조지 H. W. 부시를 꺾고 제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버락 오바마는 ‘Yes We can’이라는 간결한 문구로 암울한 현실을 바꿔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며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교적 간단하게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이 있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주변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은 실속 없이 허세를 부리는 인물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지만, 말할 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굳이 말을 아끼며 듣기에 골몰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무겁게 하며 무엇인가를 진중하게 도모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고전주의 대표적 시인 라 퐁텐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침묵하는 사람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말을 잘하는 사람과 말을 아끼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 사람일까?
단언컨대 후자이다. 웅변보다 침묵을 강조하는 금언들이 유달리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혜의 대명사인 솔로몬은 “어리석은 자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는 지혜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였고,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 키케로조차도 “침묵은 화술에서 최대의 비결”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말을 아끼라는 속담들이 적지 않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라는 것들이 그렇다.
세상의 모든 오해와 불신은 말에서 비롯되고, 현인들은 하나같이 말을 아끼라고 조언한다. 귀가 두 개인 반면, 입이 하나인 것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의 절반으로 하라는 의미에서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다.
『전당서(全唐書)』에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말이 있다. 입은 곧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란 뜻이다. 입조심만 잘해도 세상 위험의 반은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