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래서 사람 노릇을 하려면 기본적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비범한 사람이 되려면 고도의 예의로 무장해야 한다.
통상 예의는 아랫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사실 예의는 윗사람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무례하면 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받는 데 그치지만, 윗사람이 무례하면 아랫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한비자(韓非子)는 “대신은 그 나라 전체 백성을 지도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군주도 그를 대함에 있어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도 신하라 해서 소홀하게 대우하거나 창피를 주어 원한을 품게 하고 함부로 형벌을 가하면 백성들 가운데 군주를 모반하는 자가 생기게 되고, 따라서 그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군주의 무례를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사기(史記)』에 ‘무례지인명필위(無禮之人命必危)’라는 말이 있다.
무례한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이 위태롭다는 뜻이다.
무례는 상대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하므로 피해야 할 처신임이 분명하지만, 크게 위세를 떨칠 사람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자신의 앞길에 커다란 함정을 스스로 파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세력을 잃고 떠돌던 망명객 한 사람에게 무례를 가한 대가로 후일 왕위에서 쫓겨나 후회 속에 죽음을 맞은 인물이 있었다. 춘추시대 조(曺)나라 군주 공공(恭公)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헌공(獻公)은 애첩인 여희(驪姬)를 지극히 사랑했다.
군주의 총애를 받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여희는 자신의 소생을 후계로 삼으려 했고, 그런 의도는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둘째 아들 중이(重耳)는 본국을 탈출하여 망명객의 신분으로 19년 동안이나 각국을 전전하다가 후일 진나라의 군주가 되어 부국강병을 이루고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니, 그가 춘추오패(春秋五霸)의 두 번째 패자인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문공은 기나긴 망명 생활 중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답하고, 무례를 가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설욕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망명객 시절 중이가 조(曺)나라에 잠시 머물 때 조나라 군주인 공공은 중이를 유랑객으로 취급하며 함부로 대했다.
이를 지켜보던 조나라 대부 희부기(僖負羈)는 중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니 홀대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공공은 듣지 않았다.
중이는 남들과 달리 갈비뼈가 통으로 되어있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평소 이를 궁금하게 여기던 공공은 연회 중에 “내가 듣기로 공의 갈비뼈는 통으로 붙어있다고 하던데, 옷을 벗고 보여줄 수 있소?”라며 희롱했다.
연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중이는 불쾌감을 겨우 다스리며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공공이 문틈으로 중이의 알몸을 훔쳐보고 있었다. 중이는 모욕감에 치를 떨며 설욕을 다짐했다.
희부기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니, 그의 아내는 중이가 후일 제후의 자리에 올라 무례한 나라를 친다면 조나라가 가장 먼저 당하게 될 것이라 예언하면서 중이에게 호의를 베풀라고 조언했다.
희부기는 아내의 말대로 중이에게 예의를 다하는 한편 맛난 음식을 만들어 값진 구슬과 함께 보냈는데, 중이는 음식만 받고 구슬은 되돌려 주었다. ‘수손반벽(受飱反璧)’이라는 말이 생긴 유래이다.
훗날 중이가 진나라 군주가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진문공은 자신에게 무례를 가한 공공을 사로잡아 모욕적 포로 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복수했고, 희부기의 영지는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과거 자신에게 베풀었던 호의에 보답했다.
우리 역사에도 위난에 처한 군주에게 예의를 다하여 당대의 복락은 물론 후손 대대로 기록적 영화를 누린 인물이 있었다. 고려 현종(顯宗)의 장인 김은부(金殷傅)이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피해 개경에서 나주까지 피난길에 나섰던 현종은 거란군이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에 공주에 들렀다.
왕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공주 절도사 김은부는 교외까지 나가 정중히 현종을 맞은 후 “성상께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갖 고생을 겪으시며 이런 지경까지 이르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라고 위로하며 예를 다하였다.
거치는 역마다 역졸들은 도망치고 제 살 궁리만 하는 관리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으며 초라한 행차를 이어가던 현종은 김은부의 예의 바른 태도에 감동하였다.
이어 김은부는 의대(衣帶)와 토산물을 공손히 올리고, 맏딸에게 어의(御衣)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며, 매 끼니 따뜻한 음식을 정성껏 지어 올렸다.
현종은 김은부의 정성을 잊지 못해 그의 맏딸을 왕비로 맞아 들었는데, 이 사람이 원성왕후(元成王后)이며, 김은부의 나머지 두 딸도 모두 왕후가 되었다.
후일 김은부는 조정 대신이 되어 지중추사와 호부상서를 거쳐 중추사상호군에 제수되었으며, 죽는 날까지 국구(國舅)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맏딸인 원성왕후는 덕종(德宗)과 정종(靖宗)을, 둘째 딸인 원혜왕후(元惠王后)는 문종(文宗)을 출산하는 등 외손자 세 명 모두 왕이 됨으로써 김은부의 안산 김씨 가문은 고려 왕실 최고의 외척 가문으로 대대로 영화를 누렸다.
예의는 문명인이 지녀야 할 상식에 가깝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비용 없이 많은 사람을 우군으로 만들 수 있으며, 심지어 적대적 상대를 우호적 세력으로 만들기도 한다.
실제 예의와 호의를 활용하여 적진을 무력화하고, 적군의 존경까지 끌어낸 특출한 인물이 현대 전쟁사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프리카 전선에서 연전연승하며 연합군을 떨게 했던 독일의 전쟁영웅 롬멜이다.
롬멜은 1891년 교사였던 아버지 에르빈 롬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때 왕실 보병사관후보생으로 군에 투신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 소위로 참전했고, 이후 나치에 가입하여 활동 중 히틀러의 눈에 들어 경비대장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제7 전차부대를 이끌고 프랑스 전투에 참전하여 마지노선 돌파에 공을 세웠다.
롬멜의 능력을 알고 있던 히틀러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고전하던 이탈리아군의 지원을 위해 그를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영국군에 비해 전력상 열세에 있음을 알게 된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처럼 꾸미는 등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연전연승하였고, 영국군은 이런 롬멜을 ‘사막의 여우’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롬멜은 전략적으로도 탁월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한 번은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바닥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세를 취하는 대신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해 주었는데,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쟁터에서 인도적 호의를 베푸는 적군 지휘관에게 영국군 병사들은 감동했고, 이렇게 롬멜은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존경받는 전쟁사에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독일과 모든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의회에서 “이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개인적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라며 롬멜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적에게 무자비한 공격 대신 예의와 관대함으로 전투 의지를 꺾게 하고, 자신의 군대를 정의롭게 포장하여 사기를 높인 롬멜은 천재 전략가였다.
예의는 봄날의 기운과도 같아서 얼어붙은 불통의 계곡에 소통의 물길이 흐르게 하고, 메마른 반목(反目)의 나무에 화해의 움을 틔운다.
처세술에 관한 무수한 서적이 난무하고 명사들의 조언이 넘쳐나지만, 예의가 빠진 처세는 교묘한 기법에 불과하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실로 예의는 모든 처세의 기본이요 최고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