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처세술, 모욕을 멀리하라

by 노을 강변에서

2019년 한여름 한강에 목이 없는 시신이 떠올랐다.


언론에서 연일 보도가 나오면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고, 경찰이 본격적 수사에 나선 지 며칠 되지 않아 피의자가 자수하였는데, 그는 서른 후반의 숙박 시설 종업원으로 밝혀졌다.


보도에 따르면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4만 원의 숙박비 문제로 잠시 시비를 벌였고, 몇 시간 후 가해자가 피해자의 객실에 침입하여 살인한 후 시신을 훼손하여 한강에 버렸다.


경찰은 피해자가 숙박비를 주지 않고 욕설을 하면서 가해자에게 인격적 멸시를 한 것이 살인의 동기라고 발표했다. 피해자는 상대를 무시하고 모욕한 대가로 목숨을 내준 꼴이 되었다.


토막 살인에 대한 국민적 충격이 컸음에도 더 큰 충격이었던 것은 수사받고 있던 가해자의 말이었다.


기자가 경찰에 출두하는 가해자에게 죽은 피해자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묻자 “다음 생(生)에 또 나한테 그러면 나한테 또 죽어!”라고 말하며, “정중부가 김부식 아들에게 당한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그를 죽여 복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했다.


자신의 행위가 모욕에 대한 응징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문신들을 대거 살해한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난 것은 왕과 문신들이 무신을 차별 대우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으나, 굳이 집단 살육이라는 극단적 수단이 동원된 것은 무신들을 향한 문신들의 누적된 모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전통적으로 귀족 중심의 사회로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천대하는 이른바 ‘숭문천무(崇文賤武)’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병사들은 전투와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녹봉이 제때 지급되지 않아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품계가 높은 장군들조차 왕과 문신들의 향락장소에서 호위를 서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신들의 대표 격이라 할 만한 정중부는 해주 출신으로 남다른 용모에 특히 백옥 같은 수염이 아름다웠고, 7척이 넘는 거구로 위풍당당하였으며, 인종(仁宗)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루는 궁중 연회장에서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졌는데, 불을 켜는 과정에서 권세가 높았던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분격한 정중부는 김돈중을 폭행하였고, 김부식은 아들의 무례를 꾸짖는 대신 문신들과 함께 인종에게 정중부의 처벌을 요청했다.


인종은 김부식의 체면을 생각해 이를 허락하면서도 몰래 지시를 내려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지만, 정중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김부식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세심하게 조정을 관리하며 왕실의 안정을 유지해가던 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懿宗)은 정사를 돌보는 것보다 주색을 탐닉하고 연회를 베푸는 일이 잦았다.


1170년(의종 24년) 어느 날 의종이 유흥을 위해 보현원(普賢院)으로 행차하는 길에 왕과 문신들은 유흥을 즐겼던 반면, 무신들은 끼니조차 거르면서 호위를 하였다.


무신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의종이 흥을 돋우기 위해 ‘수박회(씨름의 일종)’를 명했는데, 환갑이 넘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젊은 군졸에게 패하자 이를 보고 있던 젊은 문신 한뢰(韓賴)가 이소응을 조롱하면서 그의 뺨을 때렸다.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정중부는 격노하여 “네가 비록 문관이나 이소응은 3품이고 너는 종5품인데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치는 것을 필두로 주변에 있던 무신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고 문신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무신들은 한뢰와 김돈중을 비롯한 문신들 100여 명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냈으며, 의종의 동생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운 후 자신들이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것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이고, 이렇게 100년 동안 고려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존심이 지나치면 오만함이 되고, 오만함이 지나치면 상대를 하찮게 여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모욕적 언행이 개입된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관우(關羽)의 죽음 또한 그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모욕적 언행의 결과였다.


관우는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을 군사(軍師)로 임명하면서 관우에게 자신을 대하듯 하라고 당부하였으나, 관우는 제갈량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제갈량은 관우의 오만함이 그의 명을 재촉할 것이라 우려했다.


당시 촉(蜀)나라는 강국인 위(魏)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오(吳)나라와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고, 조조는 양국의 동맹을 깨고자 사신을 보내 오나라의 주인인 손권(孫權)을 회유하였다.


이때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이 손권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다.


“제가 듣자니 관우가 형주(荊州)로 온 뒤 유비가 아내를 얻어주어 아들을 낳고 다음에 딸을 낳았다고 하는데, 그 딸이 아직 어려 정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주공의 세자와 혼인하자고 청하겠습니다.


만일 관우가 기꺼이 허락한다면 즉시 그와 대책을 의논해 조조를 무찌르고, 그가 거절한다면 조조를 도와 형주를 취하십시오.”


손권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제갈근을 관우의 진영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갈근은 관우의 군막을 찾아 “우리 주인 오후(吳侯)께 아들 한 분이 있는데, 매우 총명합니다. 장군에게 따님이 한 분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청혼하러 왔습니다. 양가가 혼사를 맺고 힘을 합쳐 조조를 무찌른다면 이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군후(君侯)께서는 생각해보십시오”라고 말하자 관우는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단 말이냐. 네 아우를 생각해서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너의 목을 쳤을 것이다. 다시는 여러 말 말라!”며 단번에 거절하고, 수하를 불러 제갈근을 쫓아냈다.


망신당한 제갈근은 손권에게 관우가 거만하게 혼사를 거절한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고, 손권은 자신을 개에 비유한 관우의 말에 크게 분노하여 ‘촉오 동맹’을 끊어버리고 관우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일 유비는 익주(益州) 정벌에 나서면서 관우를 형주에 남겨 그곳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손권은 그 기회를 틈타 여몽(呂蒙)을 보내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형주는 삼국의 교차로 역할을 하면서 삼국의 중심이 되는 땅이었다.


제갈량은 과거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자신을 찾은 유비에게 “형주는 북으로 한수와 면수가 막고 있어 남해의 이익을 모조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만일 장군께서 형주와 익주를 점거하여 그 요충지를 지키고, 서쪽으로는 오랑캐와 조화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이월을 위로하고 밖으로는 손권과 맹약을 맺어 안으로 정사에 힘을 쓰다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상장 한 명으로 형주의 군을 허창과 낙양으로 진군하게 하고, 장군 자신은 익주의 병력을 이끌고 관중지역으로 출격한다면 천하가 목전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0년 안에 대업을 이루실 것이고, 20년이면 천하가 안정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할 정도로 천하의 요충지였다.


오만함이 지나쳤던 관우는 자신의 무용을 과신하고 늘 적을 얕보았다.


그런 오만이 삼국의 핵심 거점인 형주를 잃게 하였고, 나아가 양국의 동맹 관계를 앙숙 관계로 변질시켜 후일 양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유비의 의형제 중 한 사람인 장비(張飛)도 자신이 행한 모욕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의형제인 관우의 죽음으로 격분한 장비는 유비에게 하루빨리 복수의 전쟁에 나설 것을 재촉하는 한편, 부하들에게 관우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흰 군복에 흰 깃발을 들고 출정할 것을 선포하면서 부장인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을 불러 사흘 안에 흰 군복과 흰 깃발을 모두 만들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럽고 무리한 명령을 받은 이들은 며칠만 더 여유를 달라고 사정했으나, 장비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두 장수를 공개적으로 모질게 매질한 후 명령대로 이행치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윽박질렀다.


여러 장수 앞에서 모욕당한 범강과 장달은 치욕에 이를 갈다가 야밤을 틈타 조용히 장비의 막사로 숨어들어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장비의 목을 잘라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개인에게 사적인 모욕을 가하면 자신의 신상에 위험을 초래하는 데 그치지만, 일국을 대표하는 사신에게 공적인 모욕을 가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이 같은 일이 있었다.


한 나라의 흥망이 어찌 하나의 사건에 좌우될까마는, 외교적 측면에서만 살펴보면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의전상 모욕에서 비롯되었다.


연개소문은 대대로(大對盧)를 지낸 연태조(淵太祚)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개소문의 가문은 할아버지 연자유(淵子遊) 때부터 3대에 걸쳐 최고위직을 연임하던 강력한 신흥 무인 세력으로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외모는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 따르면 총명함과 신무(神武)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당태종(唐太宗)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구축을 위해 정복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는데, 당(唐)나라와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고구려 조정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고, 수(隨)나라 100만 대군을 격퇴한 자부심이 살아있는 무인들은 그런 대외정책을 굴욕적으로 여겼다.


왕을 비롯한 귀족 권력층과 무인세력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가 사망하였다.


관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대로 직위를 이어받아야 함에도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연개소문은 귀족들에게 애걸하다시피 하여 겨우 대대로 직위를 세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기대와 달리 연개소문이 대외 강경책을 취하자 왕과 귀족들은 나라의 평안을 위해 연개소문을 제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궁궐에 심어둔 측근으로부터 왕과 귀족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한 연개소문은 642년 군대 사열식에 귀족들을 초대하여 모조리 살해하고, 그길로 궁궐에 난입하여 영류왕(榮留王)을 죽인 후 시신을 토막 내어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이후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寶藏王)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모든 권한을 독점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쿠데타로 알려진 연개소문의 전격적 권력 장악이었다.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국정을 한 손에 쥐고 있을 무렵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이자 성주인 김품석(金品釋)을 죽이고, 그의 아내도 함께 죽였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토록 기둥에 기대서서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딸 부부의 참혹한 죽음에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하던 김춘추는 고구려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보장왕을 만났다.


보장왕은 군사를 요청하는 김춘추에게 고구려의 옛 땅인 죽령을 돌려주면 군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하였고, 김춘추가 이를 거부하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옥에 가두는 외교상 실책을 범하게 된다.


김춘추는 기지를 발휘하여 석방된 후 신라로 돌아오면서 고구려를 협상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신라는 동족인 고구려 대신 이민족인 당(唐)나라와 손을 잡았다.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가한 모욕의 대가는 국제적 고립이었다.


기마민족의 용맹과 기개가 넘쳐나던 고구려의 700년 왕업은 그로부터 불과 20년도 못 되어 북쪽으로는 ‘당’이라는 거대 강적을, 남쪽으로는 ‘신라’라는 배후의 적을 동시에 불러들이며 허무하게 역사의 문을 닫았다.


모욕을 가하는 형태는 다양하지만, 특히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상대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만은 절대 삼가야 한다.


용서를 받으면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상식이지만, 굴욕감을 느끼며 받는 용서는 오히려 복수의 칼을 갈게 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 용서를 구하는 황제를 욕보인 대가로 파멸의 길을 자초했던 모난 인물이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이다.


중세유럽 시절 교황은 세속 군주들과 끊임없는 패권 다툼을 벌였는데, 분쟁 초기에는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압도했다.


교황의 힘이 한창일 때는 막강한 군대를 거느린 황제가 교황에게 공개적으로 무릎을 꿇기도 했는데,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 그것이다. 이 별난 사건이 전개된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10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는 교황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황제가 주교 서임권을 행사하고, 교황의 임명과 폐위에 관여하는 등 초기의 교황은 황제의 신하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교회세력은 황제의 주교 서임권을 교회의 세속권력 예속의 원인으로 보고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심에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있었다.


교황은 교회 독립의 핵심인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황제에게 협의를 요청했으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주교들이 자신의 편이라고 여겨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질세라 교황은 1075년 12월 8일 일방적으로 황제의 주교직 서임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분노한 황제가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자 교황은 황제와 그를 따르는 주교들을 파문하는 것으로 맞섰다.


전례 없는 황제와 교황의 대결은 예상과 달리 황제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줄곧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들어 귀족들의 권익을 줄여가면서 왕권 강화를 추진했는데, 이런 정책에 불만을 품어오던 귀족들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교황의 편에 선 것이다.


다급해진 하인리히 4세는 사면을 받고자 추운 겨울 알프스의 고갯길을 넘어 북이탈리아 카노사성을 찾아가 교황 면담을 요청했다.


정국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 교황은 한껏 교만하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황제는 수많은 사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 앞에서 3일 동안 맨발로 파문 철회를 호소했다.


BUOnvCsRtf4.jpg 영국 화가 아서 C 마이클이 그린 '카놋사의 굴욕'


황제를 충분히 욕보였다고 생각한 교황은 1077년 1월 28일 신이 가호를 내리듯 황제를 사면해 주었다.


이로써 황제는 이전의 권위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위상이 땅에 떨어진 반면, 의기양양해진 교황은 황제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간섭하고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교황의 편에 섰던 제후들이 이번에는 교황의 넘치는 권력에 반발하게 되었다.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절치부심하던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을 설득하여 우군으로 만든 후 자신의 군대를 로마로 휘몰아 교황청을 함락하고, 교황을 폐위시켜 산탄젤로성에 유폐시켰다.


고립된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기스카르 공작에게 구조를 요청하였고, 기스카르 공작은 교황을 구한다는 구실로 로마에 진입하여 무자비하게 민간을 약탈하였다.


로마시민은 약탈자를 끌어들인 교황을 원망하며 교황청을 공격하였고, 로마에서 쫓겨난 교황은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 피난처에서 근근이 살아가다 지난 영광시대를 회상하며 쓸쓸히 죽어갔다.


살인사건에는 특별한 살인 동기가 없는 이른바 ‘묻지마 살인’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 살인사건은 모욕 때문에 발생한다.


사소한 시비로 시작하여 칼부림까지 가는 사태로 발전되었다면 그 과정에는 십중팔구 어느 일방의 모욕적 언행이 개입되어 있다.


이는 오랫동안 절친했던 사이나 심지어 생면부지의 사이라도 다를 게 없다.


그래서 말인데, 어떤 이유에서건 누군가에게 모욕을 가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즉시 중단할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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