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에 앞장서지 마라

by 노을 강변에서

언변에 능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만, 그런 능력을 자기 과시나 타인 공격에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발생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경박함을 얻게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보복을 부르는 것이 그렇다.


오늘날 정당정치에서 한 정파의 대변인이 되면 모진 언어로 상대 정파를 매섭게 공격하곤 하는데, 조선시대 정치사에서도 단연 언변이 뛰어나고 독설과 비판에도 따를 자가 없었던 인물이 있었다.


네 번의 사화(士禍)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무려 천여 명의 선비들이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 정여립(鄭汝立)이다.


정여립은 증조부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을 지냈고, 아버지 정희증(鄭希曾)이 군수를 지낸 전주의 명문 가문 출신으로 1546년(명종 1년)에 태어났다.


19D2ZGKuGu7.jpg 정여립


정여립이 태어날 때 정희증의 꿈에 정중부(鄭仲夫)가 나타났는데, 정희증은 이를 두고 정여립이 후일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겼다.


정여립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다르고 두뇌가 명석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밝았다.


15세 때 익산 군수이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곤 하였는데, 일을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통솔력이 있어 관원들이 아버지보다 그를 더 어려워했다고 한다.


1570년(선조 3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예조좌랑을 거쳐 수찬에 이르는 등 조정의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몸담고 있었는데, 한번 말을 꺼내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틀린 말을 하더라도 감히 맞서는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신랄한 언변은 늘 반대 정파인 동인(東人)을 압도했고, 성정 또한 꼿꼿하여 왕에게 건의할 때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똑바로 뜬 채 따지듯 말하여 선조(宣祖)가 괘씸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의 정치 인생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은 스승과도 같았던 이이의 사망이었다.


이후 정여립은 돌연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고, 고인이 된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성혼과 박순(朴淳)을 비난하며 서인을 공격했다.


서인들은 정여립의 변절에 격분하여 일제히 비난에 나섰고, 선조조차 그의 당적 변경을 지적하며 지조 없는 자라고 비판했다. 동인들이 정여립을 방어해 줄 만도 했지만, 과거 정여립의 공격을 받았던 동인도 적지 않아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정여립의 인망이 높고 학문이 깊다는 평판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대동계(大同契)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竹島)를 근거지로 대동계의 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무력을 길렀으며, 1587년(선조 20년)에는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후 대동계의 조직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이 정여립을 반역죄로 고변하였다.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한강이 얼면 도성을 점령하여 왕을 폐하고, 정여립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불시에 관군이 들이닥쳐 관련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자 정여립은 죽도(竹島)로 몸을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자결했다.


서인 정철(鄭澈)은 이 사건 조사를 맡아 가혹한 옥사를 일으켰고,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동인이 이때 처형되었다.


심지어 형조좌랑의 신분으로 추국관(推鞫官)이 된 김빙(金憑)은 추국 중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정여립의 도당으로 몰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은 이에 관하여 “김빙은 본래 안질이 있어서 날이 춥고 바람이 차가우면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역적의 시체를 정형에 처할 때 백관이 늘어섰다. 마침 날이 매우 차가워 김빙은 눈물을 걷잡을 수 없어서 여러 번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역적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으로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호남은 ‘반역향(反逆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의 조정 진출이 어려워지는 빌미가 되었다.

정여립만큼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출세를 위해 배신을 밥 먹듯 한 소인배라는 평가에서부터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한 시대의 혁명가였다는 것이 그렇다.


역사적 평가를 떠나 정여립이 중앙정계에서 밀려나게 된 것은 그의 매운 혀가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정여립이 서인으로 있을 때는 동인을 향해, 서인에서 동인이 된 후에는 서인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는데, 그가 선조의 비판을 받게 되자 그에게 공격받았던 사람들이 제일 앞장서 선조에게 정여립을 헐뜯고 비난했다고 한다.


중국 속담에 ‘자책(煮簀)’이라는 말이 있다. 평상을 삶는다는 뜻으로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한(漢)나라 사람이 오(吳)나라에 가서 처음으로 죽순으로 만든 요리를 대접받았는데, 하도 맛있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나무라 했다.


이후 집에 돌아와 대나무로 된 평상을 부수어 삶았으나 삶기지 않았다.


죽순과 평상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한나라 사람은 오나라 사람이 자신을 속였다고 원망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은 모르고 남만 탓하는 그릇된 사람들의 심보를 나무라는 고사이다.


은혜를 베풀고도 원망을 살 수 있는 게 세상살이인데,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설령 처한 위치나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비난하더라도 공개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고, 치욕을 느낄 정도로 과격하지 말아야 하며, 비난의 끝에는 온유한 다독임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소홀하면 언젠가 어떤 일로 비난의 칼날 앞에 직면할 때 과거 자신에게 비난받았던 사람이 공격 대열의 선두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이라는 말이 있다.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비난하는 데에는 총명하다는 뜻이다.


정치평론을 잘하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긴다고 모든 이가 만족하는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스포츠 해설을 잘하는 사람에게 그 분야의 감독을 맡긴다고 항상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비판에 능한 것과 실제 역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경에 “제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탓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반대로 처신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의 삶이 바르지 못하다면 타인을 비난함에도 나서지 않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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