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미인(八方美人)’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여러 방면의 일에 능통한 사람’이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 일에나 조금씩 손대는 사람’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나, 팔방미인을 영역하면 ‘Jack of all trades’이고, ‘Jack of all trades is master of none(팔방미인은 어느 것에서도 정통하지 못하다)’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는 걸 보면 서양에서는 팔방미인을 주로 후자의 의미로 보는 것 같다.
지금은 시험이 일부 사라지고 그 명칭도 바뀌었지만, 오래전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 국가고시는 누가 뭐래도 사법시험・행정고시・외무고시 등 이른바 ‘고등고시’였다.
이들 시험에 합격하면 개인의 영광은 물론이요, 집안의 커다란 경사로 여겼고, 동네에서는 인재가 나왔다고 떠들썩하게 잔치를 하는 일도 있었으며, 출신학교에서는 합격자 이름을 플래카드에 적어 학교 정문에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걸어두곤 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을 하나도 아니고 몇 개씩이나 합격하여 2관왕・3관왕의 호칭을 달고 천재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이후 어느 분야에서든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진로의 선택지가 많은 것이 오히려 역량의 집중을 방해한 것이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어떤 일을 하건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에 집중했을 때 최선의 효과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런 원리를 무시하고, 재계 순위에 집착하며 비전문 분야에까지 무한정 진출하다 한순간 공중 분해된 기업이 있었다.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주류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진로(眞露)’이다.
2015년 봄 과거 진로그룹 회장이었던 장진호(張震浩)씨가 중국 베이징의 작은 아파트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회사자금 횡령 등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2005년 캄보디아로 도피했다가 2010년 중국으로 도피처를 옮긴 후 어려운 삶을 이어오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언론은 그의 사망 원인을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와 재기 실패에 따른 스트레스로 분석했다.
‘진로’는 평안남도 용강에서 설립한 진천양조상회가 기원으로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 소주를 생산하다 종전 후 서울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진로소주’를 생산했으며, ‘국민 소주’로 불릴 정도로 국내 소주 시장을 석권했다.
1985년 장학엽 회장의 뒤를 이어 아들인 장진호 회장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진로 제2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진로를 대기업으로 키우는 데 목표를 두었고, 그런 야망은 즉각 실행에 옮겨졌다.
먼저 ‘진로종합유통’을 설립하여 유통업에 진출하였고, ‘진로쿠어스맥주’를 설립하여 맥주 사업에 진출하였으며, ‘진로발렌타인스’를 설립하여 위스키 사업에 진출했다.
사세 확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건설・운송・백화점・화장품・프로농구단 창설 등 주류와 전혀 무관한 영역까지 무한정 확장하면서 계열사는 24개까지 늘어났고, 그의 꿈대로 진로는 소주 전문업체가 아니라, 재계 서열 19위의 재벌이 되었다.
과도한 부채를 끌어들여 문어발식 사세 확장에 열을 올리던 진로그룹이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된 것은 1997년 터진 외환 위기였다.
살인적인 고금리에 자금난을 겪으면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연쇄 부도를 맞게 된 것이다.
이후 진로쿠어스맥주는 오비맥주에, 진로발렌타인스는 프랑스의 페르노리카에 매각되는 것을 시작으로 2003년 진로그룹은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장진호 회장은 분식회계와 비자금 횡령의 혐의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장진호 회장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은 그가 재계 순위라는 허명을 좇지 않고, 가장 잘하는 소주 사업에만 충실했더라면 그런 비극적 파멸은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은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가지의 재능을 준다.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깨닫는 게 우선이겠지만, 재능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주변을 돌아보지 말고 그것에 집중하는 게 가장 단순한 성공비결이다.
자신의 재능이 골프에 있음을 알고 그 하나에 열정을 쏟아 스포츠 선수로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특별한 인물이 있다. 매니아층에 한정적으로 애용되던 골프를 세계적 대중 스포츠로 도약시킨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이다.
타이거 우즈는 1975년 12월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얼 우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골프 감각을 보였는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고, 아들에게 코치를 붙여 훈련받도록 했다.
만 3세가 되던 해 TV 쇼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 밥 호프와 퍼팅 대결을 펼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고, 5세 때에는 ABC 방송이 진행하는 「놀라운 이야기」에 골프 신동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6세 때 ‘Under Age 10 섹션’에서 우승하면서 실력을 입증하였고, 1994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전한 U.S 아마추어 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1995년과 1996년 연속으로 U.S 아마추어 대회 챔피언이 되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축하 편지를 보낼 정도로 프로선수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거대 스포츠 업체 나이키는 당시 대표모델이던 NBA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 이후의 차기 모델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우즈가 세계적 스타가 될 것으로 예감하고, 아마추어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보너스 750만 달러를 포함하여 5년간 4,750만 달러를 지급하는 파격적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프로에 입문한 이후 우즈의 성적은 경이로웠다.
1996년 프로 데뷔 이후 2010년까지 메이저 대회 15승, PGA 투어 81승을 거두면서 세계 골프계를 지배하였고, 2002년부터 2013년까지 2012년 한 번을 제외하고 매년 가장 많은 돈을 번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어떤 인물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극히 한정된 영역에서 한정적 재능만을 발휘했던 특이한 인물이 있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의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후일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다.
그랜트는 1822년 오하이오주 포인트 플레젠트에서 가죽 무두질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중위권 성적으로 졸업한 후 멕시코전쟁에 참전하였다.
1848년 미주리주의 노예 소유주의 딸과 결혼하여 네 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대위로 승진한 후 가족과 떨어져 캘리포니아주에서 한동안 근무했는데, 이 기간 여러 방면에 투자한 것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술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평판이 나빠져 1854년 불명예 제대하였다.
이후 7년 동안 농부・부동산 중개인・가죽가게 보조인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으나, 어느 것에도 성공하지 못했고,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주머니 시계를 팔아야 할 정도로 빚에 쪼들렸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에게 희망을 던져 준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는 예비역으로 자원입대하였고,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했던 북군은 그를 대령으로 임명하였다.
군인으로 복귀한 그랜트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자원 2군 연대의 지휘관을 맡아 오합지졸이던 병사들을 엄격히 훈련하여 정예부대로 변모시키는 등 남다른 지휘 능력을 보였고, 탁월한 전략과 특유의 돌파력으로 테네시주의 헨리 요새와 도널슨 요새를 점령한 데 이어 미시시피의 요충지인 빅스버그를 함락하는 등 발군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남군에게 번번이 패배하던 북군에게 그랜트의 등장은 북부 사람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링컨의 신임도 대단해서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하는 참모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1864년 3월 그랜트를 중장 진급과 동시에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연승을 이어가던 그랜트는 드디어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최종 점령하고, 1865년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남북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4일 만에 링컨이 암살되고,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존슨이 전후 남부의 처리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불만을 품은 북부의 급진파들은 그랜트의 저돌성에 기대를 걸고, 그를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여 당선시켰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그랜트는 북군 총사령관 시절의 뛰어난 능력을 국정에서는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남부의 재건과 국가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그에게는 벅차기만 했고, 연방정부의 운영 또한 과거 군을 통솔하던 시절의 거친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측근들에 이어 대통령 자신까지 뇌물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랜트의 정치적 역량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재선에 성공했으나,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퇴임 후 가정을 돌보는 것에도 무능하여 중개회사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파산을 맞기도 했다.
말년에는 생활비가 떨어져 대통령 시절의 기념품을 담보로 돈을 빌려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과도한 흡연과 음주를 멈추지 않았던 그랜트는 후두암을 얻었고, 빚을 갚기 위해 세상을 떠나기 4일 전까지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먹어가며 필사적으로 회고록 집필에 매달려야 했다.
신은 그랜트에게 단 하나의 재능, 즉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만을 부여하였다.
사관생도와 하급장교 시절에는 이렇다 할 재능을 보이지 못했던 그가 유독 남북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군 지휘관’이라는 특수한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천재라 하면 하나의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가지는 게 일반적인데, 전혀 다른 여러 분야에서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조각가・발명가・건축가・과학자・음악가・공학자・문학가・해부학자・지질학자・수학자・요리사・도시계획가・식물학자・의사・역사가・지리학자 등 수십 개의 분야에서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고,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등과 같은 그의 작품은 오늘날 지상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고독에 힘들어했고, 다방면에 걸친 지적 호기심은 그의 삶을 잠시도 편하게 두지 않았다.
그는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끊임없이 그렸는데,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해 보았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해부학에 심취했다.
그는 방부제도 냉동시설도 없었던 그 당시 장기를 세밀하게 묘사하기 위해 썩어가는 시체와 함께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 있기도 했고, 금지된 시체 부검을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후원자의 정치적 역정에 따라 수 차례 도망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천재’라는 용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상 이상의 무한 재능을 가진 인간 이상의 인간이었다.
통상 한 가지 재능만을 부여하는 신은 자신의 재능 분배가 공평치 못했음을 뒤늦게 깨달았고, 결국 그에 비례하는 고난을 함께 부여하는 것으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 했다. 그토록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에 걸맞은 영광을 누리지도 못했고, 삶조차도 평탄치 못했던 이유이다.
어떤 면에서 인생은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다.
한정된 병력으로 전선을 확대하면 전투력이 분산되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 전투에서도 분야를 확대하면 어느 분야에서도 만족할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인간은 한 분야에 집중할 때 최선의 결과가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자신 있는 분야를 버려두고 성공이 불확실한 여러 분야에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