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한 이론가보다
어눌한 경험자가 낫다

by 노을 강변에서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할 때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해당 분야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론은 경험이 축적되어 법칙처럼 굳어진 논리적 결정체와도 같아서 초심자의 길잡이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 형성의 배경적 상황이 현재 상황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으므로 과거에 기초한 이론을 현실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기엔 한계가 따른다.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만약 당신이 기업의 대표로서 회사의 명운을 건 프로젝트의 책임자 한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고 가정할 때 경험은 부족하나 이론에는 밝은 사람과 이론에는 어두우나 경험이 많은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후자가 덜 위험하다. 이론으로 경험을 대체할 수 없고, 경험으로 이론을 대체할 수 없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면 이론에만 해박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만은 피하는 게 좋다.




나라의 흥망이 걸려있는 전쟁에 임하여 이론에는 해박하나 경험이 없었던 장수를 내세워 망국으로 이어진 경우가 실제 중국 전국시대에 있었다. 이른바 ‘장평대전(長平大戰)’에서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와 건곤일척 승부를 겨루었던 조(趙)나라 장수 조괄(趙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나라에 조사(趙奢)라는 명장이 있었다. 호시탐탐 조나라를 노리던 진나라는 조사가 있는 동안에는 감히 조나라를 넘보지 못했으나, 조사가 죽자 대군으로 조나라를 침공하였고, 위기를 느낀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은 병법에 통달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조사의 아들 조괄을 대장군으로 삼아 나라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루는 조괄의 어머니가 왕을 찾아와 자기 아들은 대장군 재목이 아니라면서 임명을 취소해달라고 간청했다. 효성왕은 아들의 대장군 임명을 영광스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반대하는 조괄의 모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효성왕이 이유를 묻자 조괄의 모친은 생전 남편이 “군대를 통솔한다는 것은 나라의 존망과 관계된 일인데, 괄이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니, 만약 괄이가 병권을 쥐게 되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남편은 대장군으로 있을 때 군영에서 살다시피 하며 상금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부하를 혈육처럼 아끼고 사랑했는데, 아들은 대장군이 되자마자 거만하게 행동하며 조정에서 받은 돈으로 전답부터 사들이는 탐욕을 일삼는다며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대장군 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괄의 모친이 물러간 후 효성왕은 조정 중신들을 소집한 자리에 조괄을 참석시켜 진나라 군사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조괄은 기다린 듯 병법의 구절을 청산유수처럼 암송하며 막힘없이 대답했고, 그 자리에 있던 왕과 신하들 모두 조괄의 병법 지식에 감탄했다.

효성왕은 조괄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재신임하는 동시에 병력 지휘의 전권을 부여했다.


조괄은 의기양양하여 이전의 군령들을 병법 이론에 근거하여 모조리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 또한 병법 이론을 거론하며 조목조목 반박한 후 자신의 고집대로 진을 펼치고 진나라의 백전노장 백기와 대적했다.


백기는 작은 전투에서 의도적인 패배를 하며, 조나라 군대를 협곡으로 유인했고, 실전경험이 없었던 조괄은 작은 승리에 취해 주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진격만을 고집하다 40만 전 병력이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조나라 군대는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기아에 허덕이다가 처음에는 말을 잡아먹고, 나중에는 부상병들의 인육까지 먹어가며 46일을 버텼으나, 끝내 포위를 풀지 못했다.

조괄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무모하게 포위망을 뚫다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조나라 병사들은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모두 산 채로 매장되었다.


장평전투에서 대패한 조나라는 이후 다시는 국운을 떨치지 못하고 비틀대다가 기원전 228년 진나라에 멸망되고 말았다. 실전 경험 없이 이론만을 앞세워 군대를 지휘한 조괄의 망국적 전략은 후세에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는 뜻을 지닌 ‘지상담병(紙上談兵)’이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지』에 나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울면서 마속(馬謖)을 처형한다는 뜻으로 큰 목적을 위해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이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마속(馬謖) 역시 병법 이론을 과신했던 탓에 패전의 멍에를 안고 스승과도 같은 제갈량(諸葛亮)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마속은 ‘백미(白眉)’로 유명한 마량(馬良)의 5형제 중 막냇동생으로 190년 형주(荊州)에서 태어났다. 형주 종사의 신분으로 유비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왔는데, 제갈량이 그의 재능을 아껴 늘 측근에 두었으며, 전략에 관해 조언을 듣기도 했다. 마속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병법 논하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말솜씨가 좋았다. 유비(劉備)는 매사 말이 앞서는 마속을 늘 염려하였는데, 죽음을 앞두고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227년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위(魏)나라를 치고자 1차 북벌에 나섰는데, 한중(漢中) 동쪽에 있는 가정(街亭)은 물자 수송의 요충지이자 전략상 잃어서는 안 되는 핵심 거점이었다.


제갈량이 가정 수비의 책임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져있던 차에 마속이 자원했다. 제갈량은 마속의 능력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었지만, 위나라의 장수는 병법과 경험을 겸비한 노련한 사마의(司馬懿)였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제갈량에게 마속이 “제가 다년간 병략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를 지켜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가정을 잃는다면 제 목은 물론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참형에 처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며 간청했다.


장수들은 마속이 실전경험이 없고, 병법에 해박함을 지나치게 자신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제갈량은 고심 끝에 마속을 선봉 총대장으로 임명하여 출정시켰다. 그러나 제갈량도 마속이 미덥지 않았던지 가정의 지리적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위나라 군사로부터 가정의 도로 요충지를 지키는 것이 출정의 주요 목적임을 주지시켰다.


마속이 가정에 도착하여 지형을 살펴보니, 제갈량이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그 도로의 인근에 삼면이 절벽으로 된 산이 있었다. 마속은 모든 이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제갈량의 판단을 넘어서는 병법을 구사하고 싶었다. 그는 위나라 군사를 산으로 유인한 후 역공을 펴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산 위에 진을 치라고 명령했다.


마속의 명을 받은 참모들은 퇴로가 막힌 산 위에 진을 치면 포위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굳이 산 위에 진을 치려면 군대를 둘로 나누어 산 위와 아래에 진을 치자고 간언했으나, 마속은 높은 지대에서 아래에 있는 적을 공략하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단순한 병법 이론을 내세우며 산 위에 전군의 진을 치도록 재차 명령했다.


군을 이끌고 가정에 도착한 사마의는 퇴로가 없고 물이 없는 산꼭대기에 진을 친 마속의 군대를 보고 한바탕 크게 웃고는 일체 공격을 하지 말고 겹겹이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위나라 군사들은 포위만 하고 있을 뿐 공격하지 않았고, 촉의 병사들은 포위된 산 위에서 갈증과 허기에 지쳐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지둥하다가 장합(張郃)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병참의 요충지인 가정을 잃어버리자 제갈량은 전쟁 수행이 불가함을 깨닫고 전 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으며, 마속에게 중책을 맡긴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마속의 처벌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며 만류했으나, 제갈량은 군율의 지엄함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처형했다.




“경험 없는 사람을 쓰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에게 낯선 일을 맡기는 것은 갓 입대한 신병에게 부대 지휘권을 맡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어떤 조직에서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여 육성함이 마땅한 일이나, 목전에 화급하고 중차대한 과제가 놓여있고,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면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백 번이고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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