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호환 마마 곶감보다 무서운 것

by 김재호

‘누군가’ 나에게 고기와 소주를 사줄 테니 저녁에 나오라고 한다면 얼씨구나 하고 나갈 의향이 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나와 비슷한 분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바로 법인카드 결제 권한이 있는 직장 상사라면 어떨까? 잠시 머뭇거리는 분들이 있을 듯하다. 나의 저녁 시간과 공짜 삼겹살의 가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면 이미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거기다가 심지어 그 상사가 평소에 좋지도 않고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업무나 선약, 그것도 이미 써먹었다면 집안일을 핑계로 거절할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코로나보다 무서운 회식’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얼마 전에 보았다. 바이러스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강도가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안타깝게도 생명을 잃거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런 현실에서 회식이 더 무서운 존재라니. 도대체 회식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회식 자체가 불편한 것이라면 상사도 싫어해야 정상인데 왜 그들은 자꾸만 자리를 만들어 부하 직원들을 모이게 하는 것일까?

나도 사회 초년생 시절을 겪었다. (‘나 때는 말이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라.) 처음 한두 차례는 멋도 모르고 회식에 참석했다. 따라주는 술 마시고 빈 잔을 채우고 고기가 떨어지면 주문하고 혹시라도 먼저 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싹 차리고 버텼다. 가끔 상무님이라도 같이 참석하시면 부장님 이하 다들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몸과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래도 뭐 일에서 잠깐 멀어지니까 좋았다. 선배들하고도 친해지는 것 같았고.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상사들의 술버릇이 좀 심했다. 택시 태워 집에 보내드릴라 치면 타자마자 택시기사에게 욕을 퍼부어 싸움이 벌어지고, 한 기수 빠른 선배가 아래 기수 선배들에게 요즘 애들 왜 그러냐고 타박을 하면 다음날 고스란히 후배들은 회의실에 모여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저녁에만 잠깐 모이는 회식까지는 어찌어찌 참을 만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야유회는 회식과는 또 다른 아찔한 경험이었다. 장소 선정부터가 난관의 연속이었다. 각자 이유를 대며 하나씩 추천 아닌 추천을 하는데 총무를 맡은 내 윗 기수 선배는 야유회 당일이 점점 다가올수록 피우는 담배의 개수가 급속도록 늘어갔다. 그러다가 간신히 장소가 선정되자 이번에는 메뉴부터 술 종류, 그리고 1박 2일간의 일정이 또다시 그를 힘들게 했다. 족구는 부장님이 좋아하시니까 넣어야 하고, 아침 산행을 좋아하시는 상무님 덕에 등산이 추가되었으며 여사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숙소에서 가까운 삼림욕장을 원했다.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숙소에 도착해서 한 시간 가량 우리의 반성할 점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간략한 훈시가 끝나자, 한쪽 구석에서는 이미 술판이 벌어졌고 다른 방에서는 고스톱과 포커판이 열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이 들 만하니까 미리 독방에서 숙면을 취하신 상무님이 산행 안 가냐며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족구까지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점심까지 다 같이 먹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작 1박 2일이었지만 26개월 군생활의 축소판으로 느껴졌다. 다음 출근날 상무님과 부장님은 정말 즐겁고 유익한 야유회였다며 가을에도 이번처럼 잘 준비해서 꼭 가자고 하신다.

그렇게 사원에서 대리, 그리고 과장을 거쳐 어느새 작은 스타트업 기업의 이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지인끼리 모여서 시작한 회사라 직원 수도 얼마 안 되다 보니 회식이 잦았다. 집에 일찍 들어가 봤자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아내나 아이도 자기 일로 바쁘다 보니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저녁 식사는 해야 하니까 밥도 먹을 겸 직원들과 회식을 자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세상 편했다. 알아서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골라서 맛집을 섭외해주고, 내가 불편한 게 없는지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주고, 이야기를 꺼내면 다들 귀담아 들어주고, 술이 좀 취해도 다들 그러려니 이해해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시간이었다. 계산도 일정 금액 내가 쓸 수 있는 회사 비용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런 회식 자리를 없앤 아주 ‘사소한’ 일이 있었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직원들이 너무나 화사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모습을 발견한 그 후의 직원들의 모습. 끔찍하게 후회스러웠다. 그 후로 나는 직원들이 회식 안 하냐고 좀 하자고 할 때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략 다섯 번에 한 번 정도만 참석했고 요기만 간단히 마친 후 카드를 총무에게 건넨 후 친구와 따로 잡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혹자는 회식을 업무의 연장선이라고들 하지만 왜 굳이 술자리를 빌어 업무를 하는지 묻고 싶다. 다음 날 제대로 기억도 못 할 거면서. 그리고 노래방에서 박자를 맞춰주고 같이 몸을 흔들어 주는 게 어떤 업무와 연관성이 있으며, 우리를 아끼는 선량한 마음에서 비롯된 회식이라면 직원들이 힘들 때 자비를 쓸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직원 간의 단합? 그 역시도 술자리에서 싸우는 경우나 부적절한 언행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경우를 훨씬 많이 봤지 업무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관계가 회식 때문에 갑자기 생기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지 않지만 내가 초년생일 때 처음으로 부장님한테 깨진 날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한 기수 위 선배가 내 등 뒤로 지나가면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옥상으로 잠깐 올래?’ 선배는 옥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료수 캔 두 개를 들고서. 따뜻한 회식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선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유의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