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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r 15. 2023

모범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

89년도 모범청소년


  학창 시절(대학교는 제외)을 되돌아보면 나는 ‘대체로’ 착했다. 인상도 편안해 보이는 편이고, 말투도 거칠지 않아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두루두루 무난했다. 누군가와 치고받고 싸운 기억도 없고, 사고를 쳐서 선생님께 크게 꾸중을 듣지도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궁금해하실 것 같다.


주변에 잡다한 것들은 무시하시고 '트로피'에 집중하시길


 짜잔~


  내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가 여기에 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내가 받은 것이 분명하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가 이 트로피를 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


  1989년이면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텐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낡고 색 바랜 이 물건이 아직도 집에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어머니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나는 내가 받았던 상장이며 임명장 같은 것들은 대부분 버렸다. 취직을 해서 독립할 때,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 나머지 것들도 과감히 정리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부모님 댁에 갔다가 아이가 벽장에서 이것을 발견한 것이다.


  “할머니 이 트로피 누구 거예요?”

  “네 아빠 거지?”

  “진짜요? 아빠가 모범청소년이었다고요?”

  “그럼,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착했는데.”     


   아이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알고 있는 나는 대략 이렇다.


  대학교 때 학사 경고를 두 차례 받은 후 성적표가 나오기 전에 군대로 도망갔으며, 담배를 피웠었고, 술을 사랑하고, 사소한 일에 발끈하여 잔소리가 많고, 아내 속 썩이고, 부모님께 효도는커녕 화도 잘 내는 그런 까칠한 아저씨.


  그런 아빠가 그냥 청소년(혹은 비행)이 아닌 '모범'청소년이었다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할머니에게 부탁해서 집에 들고 가겠다는 아이에게 그냥 버릴 것이라고 했더니 절대로 안 된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사뭇 진지하게 대답한다.


  “예전에 모범청소년이었니 모범어른도 될 수 있을 거야. 이거 보면서 노력해.”


  그나저나 어머니는 왜 이것을 버리지 않고 여태 갖고 계셨을까. 아들이 예전에는 모범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시려고? 아니면,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여쭤보면 될 일이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서로 괜히 쑥스러워질 수 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오래전에 받은(것으로 추정되는) 트로피를 막상 다시 보니 기분이 묘하다. 진짜로 모범적으로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


  트로피에 쌓인 먼지 좀 닦아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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