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저도 애주가까지는 아니고 그저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술이 가진 좋은 영향력도 분명히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뉴스 기사를 보다 보면 이런 문구를 마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술이 원수지. 유명인 ooo 씨 음주운전 사고로 입건’
세상에나. 술이 왜 원수입니까?
과일 깎아서 먹던 칼로 사람을 해하면 칼이 원수일까요?
남의 나라 쳐들어가서 쑥대밭을 만들면 미사일과 탱크가 원수일까요?
물론. 저도 술 먹고 실수를 한 적이 많습니다. 취기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딸에게 해서 다음 날 울게 만들었고, 끊었던 담배를 가끔 다시 입에 물었으며, 벤치에서 잠들었다가 모기한테 왕창 물려서 병원에 간 적도 있고, 목소리가 커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드렸습니다. 그래도 술이 원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신 바로 제가 죄인이지요.
또 이런 문구도 자주 따라다닙니다.
‘심신 미약으로 정상참작’
물론 의도하지 않은, 명백한 실수인 경우에는 그 사정을 헤아려 주는 게 일반적으로 이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고의가 전혀 없었던 경우나 말 그대로 우연히 벌어져서 막을 수 없었던 사고, 혹은 천재지변 같은 상황 말입니다. 그런데 술 마신 사람은 앞서 말한 그런 상황과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리계획했던 범죄를 제외하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안타까운피해자도 생기지 않았겠죠? 아무런 이유없이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고 심하면 죽음에까지 이른 피해자는 무슨 날벼락입니까? 가해자가 술을 마셨든 맨 정신이었든 피해자가 받는 고통의 크기와 무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술 마시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흔히들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에는 이런 뜻이 숨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도 술 마시면 실수할 거니까 우리 서로 이해하면서 그냥 넘어가자.’
회사 생활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회식’은 보통 ‘회식(會食)’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회주(會酒)’에 가까웠죠.
식사의 개념이 아니라 음주의 개념이 더 컸으니까요.
그런데 제 경우에 회식이 꺼려졌던 이유가 술이 아닌 다른 데 있었습니다.
평소 업무 시간의 상사는 상사니까 존경하고 따르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식 아니, ‘회주’ 자리에서의 상사는 조금 달라집니다.
(모든 상사가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말이 많아지고, 개인적인 일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물어보고, 했던 말 또 하고, 더 취하게 되면 하지 않아야 하는 말이니 행동으로 이어지고.
게다가 다음 날이 되면 전날 있었던 일을 온전히 기억은 하는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만약 ‘회주’ 자리에서 후배들 술잔 채워주면서 그들의 말은 최대한 들어주고, 그 이야기에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업무에 즉시 반영해 주는 상사라면 ‘회주’를 그렇게 싫어할까요?
오늘도 술은 유혹합니다.
힘들지? 나를 마시고 하는 행동과 말들은 다들 이해해주고 덮어주니까 힘을 내서 더 마셔.
걱정 따위 싹 다 잊어버리고 나랑 놀자니까.
너도 원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