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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11. 2023

이별 준비


너를 보며 지금껏

많이 웃기도 했고

또 울기도 했지.


가끔은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났고

때로는

열심히 목이 쉬어라 응원도 했구나.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얼굴을 마주한 지도

벌써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


인간으로 치면

가장 생기가 넘치고

잠재력이 뿜어져 나올 나이겠지만

너는 그렇지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결혼할 때

너와 처음 만났고

이제는 아이도 훌쩍 컸으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그동안 고마웠다.

잠시 너만의 시간을 줄게.


네가 쓰고 지냈던

그 수많은 가면은 이제 벗어버리고

너의 얼굴로 잠시 쉬렴.


이렇게 물끄러미 너를 보고 있자니

네 이름이 ‘보르도 TV’ 였다는 사실이

문득 기억나는구나.


건배는 하지 않을게.

그리고 앞으로 너를 대신할 친구를

쉽게 들이지는 않을게.


출처 : Pixabay


  어제저녁, 신나게(사실은 끌려가는 경기 때문에 우울하게) 야구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비는 세로로 내리는 것이 정상인데 가로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원을 꺼보기도 하고,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등도 몇 차례 두들겨 줬지만 오히려 상태가 더 심각해져 갑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챕니다. 17년 동안 여러 거실을 거쳐가며 꼿꼿하게 자리를 지켜줬었는데 이제는 힘에 부치나 봅니다.


가로로 내리는 빗물 (출처 : 김재호)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아침에 다시 켜보니 간밤에 컨디션을 회복했는지 활짝 갠 얼굴이더군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우울한 비가 내립니다. 수리를 해 볼 생각도 있긴 하지만 과연 될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 부품의 수명이 다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곳들도 곧 망가질 것을 의미하겠죠.


  며칠간 더 데리고 있다가 딱지를 사서 주말에 내놔야겠습니다. 아니면 이사를 갈 때까지 그냥 데리고 있을까도 고민 중입니다. 이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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