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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24. 2022

신뢰를 쌓는 중

- 이름

= OO

- 나이

= OO

- 주소

= OO시 OO구

- 언제부터 그 현장에 있었어?

= 그게 중요한 문제라면 거짓말을 할 거고, 사소하고 쓸데없는 절차 중 하나라면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 뭐? 알았어. 솔직히 언제부터 숨어있었는지는 이번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 그러니까 진실을 말해.

= 말투나 눈빛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 이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야. 거짓이 섞이면 뒤에 나오는 말도 전부 믿을 수 없게 된단 말이야. 그래서 뻔히 다 알고 있는 것부터 먼저 물어봤던 거지. 이름, 나이, 주소 이런 거는 거짓말하기도 힘들고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니까.

= 그런데 왜 반말합니까? 제 나이를 알려줬으니 그쪽 나이도 말해보세요. 이건 신뢰를 쌓는 과정이니까.

- 내가 어리면 존대를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해?

= 네. 물론입니다.

- 진심으로?

= 네.

- 동갑이니까 서로 말 편하게 하자. 됐지? 현장에서 잡혔을 때 본인은 그저 목격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는데. 맞아?

= 목격자 맞는지 묻는 거야? 아니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 서로 바쁜데 말장난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 어허, 갑자기 시력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혹은 목적은?

= 비꼬지 마. 내가 본 게 있긴 하지만 약간 어둡기도 했고 시력이 나빠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거야.

- 그러니까 본인은 범인도 아니고 목격자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 이런 말인가?

= 이제야 대화가 조금씩 통하는군. 그런데 말투가 영 거슬려.

- 존대니 말투니 그딴 거 다 집어치우고 내 눈 똑바로 봐. 네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겠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한 번 해 보라고.

= 범인을 잡고 싶어? 그렇다고 해서 나를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건 정답이 아닐 텐데. 아직도 모르겠어? 그리고 증거는? 있으면 가져와 보라고.

- 동료들이 열심히 찾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이번에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번번이 그냥 풀려나니까 자신감이라도 생겼나 보지?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야. 앞으로 영원히 햇빛을 못 보게 만들어 주겠어. 

= 죄가 없었으니까 풀려났던 거잖아. 헛된 믿음 때문에 애꿎은 동료들만 고생시키지 말라고. 목이 마른데 물이나 한 컵 가져다줘.

- 참아. 질문 몇 개 더 하고.

= 이런. 그렇게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어쩌자는 거야. 꼭 네가 범인 같잖아.

- 헛소리 집어치워. 거기에는 왜 갔던 거지? 평소 다니던 동선에서 너무 벗어났잖아.

= 모험을 해 보고 싶었어. 그게 이유야. 번번이 나한테 누명을 씌우는 그 녀석을 잡고 싶었거든. 그리고 내가 내 발로 가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네가 나를 체포하지만 않았으면 아직도 그 근처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쉽군. 하지만 뭐 당신도 당신 일을 한다고 했을 뿐이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게. 다만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정말 나뿐인가?

- 끝까지 오리발이군.

= 나도 하나 물어보자고. 너는 왜 거기 있었지? 집이 그쪽인가? 아니면 따로 급한 볼 일이 있었나?

- 물 달라고 했지? 기다려.

= 잠깐만. 내 휴대폰 확인해 봐. 현장에서 내가 동영상 하나를 찍었거든. 눈이 나쁘다고 해서 동영상도 뿌옇게 찍히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 이번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거야.

- 뭐라고? 이 자식. 거짓말하지 마. 

= 이러지 말라고. 이거 놓고 이야기해. 우리 지금 신뢰를 쌓아가는 중 아니었나?

- 닥쳐. 거기에는 너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고.

= 그래? 내가 거기에 갔을 때 자네와 무척이나 닮은 남자가 한 여자를 살해하고 있더군. 그런데 숨어있던 나를 발견하고 만 거야. 눈이 딱 마주치니까 너는 미친 듯이 도망쳤지. 어때 이제야 손에 땀 좀 나나? 긴장감 좀 들어?

- 잠깐.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 벌써 잊었어? 성은 양, 이름은 심. 내 이름은 양심이라고. 꼭 기억해.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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