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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24. 2022

길들다

  눈이 떠졌다. 

사방은 아직 어둡다. 한번 잠들면, 설정해 놓은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기 전까지 잘 깨지 않는 편인데 무엇이 나의 잠을 방해한 것일까? 냄새, 소리, 촉감, 맛, 그 무엇도 나를 자극하고 있지 않다. 이유를 알아봤자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이불을 여미며 잠을 청해 본다.      


  다음날. 눈이 떠졌다. 어제와 같다.     


  다음날. 눈이 떠졌다. 

이번에는 지난 이틀과 다르다. 소리. 어떤 소리 때문에 깬 것이 분명했다. 어제와 그제도 소리가 나서 깼지만 잠결이라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정각. 잠시 동안 소리의 정체를 파악해 볼까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자기로 했다.     


  다음날. 눈이 떠졌다. 

분명히 소리를 들었다. 며칠 동안 새벽에 연달아 깨다 보니 몸이 무의식 상태에서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 소리를 굳이 표현해보자면 ‘똑 뿅’이 적절할 것 같다. 높은 곳에 매달려있던 하나의 물방울이 호수 같은 곳에 떨어졌다가 사방으로 물결을 이루며 퍼져나가는 청명한 소리.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켜고 싱크대로 갔다. 좁디좁은 원룸에서 물이 나올 만한 곳은 두 곳뿐이다. 싱크대는 바짝 말라있고 그릇에도 물기가 없다. 다음에는 화장실로 향했다. 역시나 물방울이 떨어질 만한 상태가 아니다. 잠자리로 돌아와 벽에 잠시 몸을 기대어 멍하니 있다가 전등을 끄고 다시 누웠다.      


  다음날. 눈이 떠졌다. 

또다시 들린 물방울 소리. 피곤과 짜증이 동시에 앞다투어 밀려온다. 방에 불을 켜고 어제와 같이 점검을 했다.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집 물소리가 들렸을 리도 없다. 왜 항상 새벽 2시에 물방울이 그것도 딱 하나가 떨어지는 것일까.     


  다음날. 스펀지 귀마개를 양쪽 귀에 쑤셔 넣고 잠을 청했다. 

‘똑 뿅’ 눈이 떠졌다. 귀마개는 여전히 꾸깃꾸깃 귓구멍 속에 박혀 있었다. 뭐지?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일까? 싱크대에 물이 한 방울씩 똑똑 흘러나오게 해 놓고 귀마개의 성능을 확인해본다. 가까이 다가가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도 들릴까 말까 한다. 게다가 잠에서 깨기 전에 들린 소리와 확연하게 다르다. 일단 다시 자기로 했다.     


  다음날. 알람을 맞춰놓았다. 

1시 59분. 휴대전화의 힘찬 진동 덕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기다렸다. 2시. 2시 1분. 2시 5분. 물방울 소리가 없다. 다시 누워서 잤다.     


  다음날. 눈이 떠졌다. 

2시. 물방울 소리. 소리의 근원은 역시나 찾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 거린다. 그냥 방에 전등을 켜 놓고 책을 읽기로 했다. 그러다 선잠이 들었다.     


  다음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잠들었다. ‘똑 뿅’ 눈이 떠졌다. 새벽 2시. 음악은 여전히 시끄럽게 귀속을 후벼 파고 있다. 망연자실. 그냥 다시 자려고 몸부림을 쳐봤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잠드는 게 무섭다. 

고작 물방울 소리 때문에 며칠 째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벌겋게 충혈된 눈 밑에 생긴 Dark Circle이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식욕도 떨어지고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어 실수가 잦아졌다. 병원에 찾아가서 진찰을 받아 봐야 할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집 사람들에게 새벽에 무슨 소리 못 들었냐고 물어봤지만 다들 시큰둥하다. 건물을 관리하는 담당자에게도 전화를 해서 점검을 의뢰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이불속에 누워 물방울 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피할 방법이 없다. 새벽 2시에 눈이 떠질 것이다.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그냥 알람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정신이 나가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쉽지 않겠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으리라 믿는다.          


  눈이 떠졌다. 

알람 소리가 시끄럽다. 여섯 시 정각. 새벽 2시를 건너뛰고 아침이 온 것이다. 작은 희열들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평소보다 주변이 어스름하다. 밖에 비가 오나보다. 그런데 희미한 빗소리 사이로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똑 뿅’ 


  원룸에 딸린 작은 베란다 입구. 거기에 놔둔 양철 재떨이로 물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천장은 축축하게 젖어 시커멓다. 한 달 같이 느껴졌던 하룻밤의 악몽이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쉰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다리, 목, 허리 할 것 없이 눅눅하고 찌뿌듯하다.     


  다음날. 새벽 2시. 눈이 떠졌다. 물방울 소리가 없다. 이런 젠장. 악몽에 삶이 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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