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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n 07. 2022

Gloomy의 Smile

  일기장에 압축된 하루가 십오 년만큼 쌓였다.

압축된 하루들을 감정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분리수거하듯 나누고, 빈도수가 많은 날들을 특별히 지정해서 나만의 ‘날’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재미 때문이었다. 열다섯 번 중에 열한 번. 10월 23일은 유난히 기분 좋은 일들이 많았던 날이다. 그래서 그날에게 ‘Smile Day’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밤이면 혼자서 조촐하게 파티도 즐겼다.     


  오늘은 가장 끔찍한 ‘Gloomy Day'다.

십오 년간 이어진 4월 6일의 일기장에는 단 하루도 우울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필 그날이 되면 뜻하지 않은 슬픔들이 불쑥 찾아와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댔다. 어젯밤 잠자리에 누우면서도 이미 머릿속은 또 어떤 일들이 나를 괴롭힐까 하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알람 대신 맞춰놓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과 함께 즐거운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자는 애청자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잠깐 동안 ‘G 선상의 아리아’를 멍하니 듣다 보니 조금 늦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신발에 대충 발을 욱여넣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내가 사는 13층에 딱 머물러있다. 

매번 1층 아니면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마치 신데렐라를 기다리고 있는 호박 마차처럼 나를 태우고 단 한 번의 정차도 없이 1층에 나를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헐레벌떡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리는데 이미 버스가 와있다.

30미터, 멀리 않은 거리지만 이미 버스의 브레이크 등이 꺼지는 것으로 봐서는 곧 출발할 것처럼 보인다. 포기할까 했지만 그래도 일단 달려보기로 한다. 버스에 간신히 올라탈 거리가 되자 갑자기 뒷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내린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툴툴 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 사람은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간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교통카드를 찍으며 아저씨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자리에 앉아있다. 

마치 무대 위에 혼자 서 있는 연기자가 된 것 같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한 승객이 내리는 바람에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아침에 들었던 곡을 흥얼거리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는데 어제 올린 브런치 글에 라이킷과 댓글이 평소보다 두 배정도 많다.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기가 울린다.

정확히 두 달 하고도 열흘 전(화해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애꿎은 날짜만 씩씩거리며 셌다.)에 싸웠던 친구의 전화다. 그날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하다며 먼저 사과의 말을 수줍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전해왔다. 나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오히려 너의 힘든 마음을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한 내가 나쁜 년이라고 했고 우리는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집에 와서 늦은 끼니를 때우는데 ‘당근’이라는 낭랑한 소리가 원룸을 채웠다.

향긋한 당근 냄새가 풍기는 휴대전화를 열었더니 내가 그렇게 애타게 찾아다녔던 제품이 합리적인 가격에 떡하니 올라와있는 것이 아닌가. 당장 판매자에게 연락을 했다. 직접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부탁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교통비 정도는 흔쾌히 빼주겠단다.     


  판매자를 만나러 가기 전에 밀린 분리수거를 하기로 했다. 양손 가득 낑낑거리며 간신히 분리수거장에 도착했는데 청소를 맡아서 하시는 아저씨께서 내가 안쓰러웠는지 본인이 해줄 테니 그냥 놔두고 가란다. 감사한 마음을 꾸벅 고개 숙여 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동생이 입에 달고 살던 한정판 운동화를 드디어 구했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깨끗했다. 딱 한 번 신었다는 판매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예쁘게 포장한 박스를 보며 저녁에 먹을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현관 벨이 울려 깜짝 놀랐다. 궁금해하며 나가보니 엄마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들을 잔뜩 해서 보내셨다. 일주일은 든든하게 보낼 것 같다.     


  저녁 식사 전에 잠시 독서나 해 볼까 하는 찰나 이번에는 전화가 울렸다.

자주 가는 도서관 전화번호다. 혹시 연체된 책이 있나 하는 불안한 생각에 전화를 받았더니 내가 신청한 ‘희망도서’가 도착했으니 이틀 내로 방문해서 대여해 가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예~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장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늘은 차분하게 되짚어 보는데 전혀 ‘Gloomy Day'와 어울리지 않는 하루였다. 이제 더 이상 ’Gloomy Day'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 같다. 일기장을 덮는 손끝에서 기쁨과 만족감이 묻어 나온다.     


  꿈을 꾼다.

열다섯의 슬픔과 하나의 행복이 함께 웃고 있다. 슬픔이 웃고 있다니 정말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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