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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n 26. 2023

장마, 노란 장화 그리고 은인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집에 도착해서도 엄마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홀딱 젖은 가방과 옷을 몸에서 덜어내면서도 울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방 속 교과서 역시도 물을 잔뜩 머금은 탓에 펼쳐지지도 않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몸에서는 쾌쾌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따뜻한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오더군요.


출처 : Pixabay


  무려 38년 정도 된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특히 장마가 시작되는 이 무렵이 되면 자연스레 그날의 저로 되돌아가곤 하죠.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인공적으로 벽을 쌓아놓은 하천이 있었습니다. 깊이는 약 2~3미터 정도 되었는데 양 옆은 보행이 가능한 인도였고 별다른 펜스는 없었습니다. 평소 등하교를 할 때 의식적으로 난간에서 먼 쪽으로 걸어 다녔죠.


  사건의 발단은 엄마가 사주신 장화였습니다. 하얀색 유니콘이 그려진 노란 장화.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였기에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천하무적이었죠.


  어린 마음에 물을 첨벙첨벙 튕기며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장마로 불어난 물로 인해 하천과 인도의 경계가 애매했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물길로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장화만 믿은 채 까불었죠.


출처 : Pixabay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떤 아저씨가 저를 물에서 건져내는 중이었습니다. 짐작하건대 발이 하천으로 빠지면서 물살에 휩쓸렸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자 하류 쪽에 있던 분이 저를 건져준 것이었겠죠.   


  그렇게 우산과 신발주머니는 잃어버리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엉엉 울면서.


  경황이 없었기에 그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은인임에도 얼굴도 성함도 모릅니다. 저를 꺼내 주느라 비도 다 맞으셨을 텐데.


출처 : Pixabay


  누군지 모르지만 감사하는 마음만큼은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겠죠. 비가 옵니다. 그날의 제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초록색 대문을 열며 들어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하천의 물이었는지 모를 물을 뚝뚝 흘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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