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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Dec 12. 2023

‘날씨’가 사라진 날.

 아빠의 손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던 여자 아이가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인지 바닥에 꼬꾸라졌다. 거친 숨소리에 맞춰 뽀얀 입김이 연신 뿜어져 나오고, 이제는 말라버린 눈물이 양볼에 땟국물 자국을 선명하게 남겼다. 엄마! 넘어진 아이의 목소리에 앞서 달리던 여자가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그녀의 시선이 아이 뒤로 재빠르게 접근하는 그림자로 옮겨가자 공포에 질린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들은 지치지도 않고 오히려 속도를 높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세 명의 냄새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쿠키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으니 그럴 법하다. 아이의 아빠는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아이의 손을 놓고 혼자서 옆으로 난 오솔길로 내달린다. 그런 아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녀에게 어둠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든다. 곧이어 날카로운 비명이 고통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아이가 찢겨나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엄마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귀를 막는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읊조린다.          


 업보.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르고 인간들이 운명이라고 부르는 연쇄반응도 일어난다. 그리고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결과가 벌어진 후라면 의도와는 이미 관계가 끊어진 것과 다름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미를 밟아 죽인 경우와 재미로 개미를 으깼을 경우 개미가 죽었다는 사실만 남는다. 물론 정상참작이라는 것이 적용되겠지만 그 역시도 앞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위험에 처한 개미를 살리는 일은 어떨까? 개미가 죽지 않도록 막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지수와 변수가 많아 속단하긴 어렵지만 일단 나는 선택했다. 개미를 위해 인간의 다리와 팔을 자르기로.     


 자,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다. 거창하게 법칙이나 논리라고 부를 마음이 없으니 가볍게 들어주면 좋겠다. 만약 인간이 매우 추운 지방에서 거주하기로 했다면 어떤 식으로 거기에 적응할까? 아마도 온도 유지가 되는 집을 짓고, 난방 시설을 갖추고, 두꺼운 옷과 신발을 준비하고, 극한의 환경에도 버틸 수 있는 자동차를 구입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냐고? 그렇다면 인간 이외의 동물이나 식물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아는 범위에서 예측을 해보자면 분명 인간과는 다른 전략을 택할 것 같다. 동상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피부와 체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길고 풍성한 털을 갖게 되거나 따뜻한 동물의 몸속에서 기생하며 사는 길을 택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식물 역시도 뿌리, 줄기, 잎 등을 환경에 맞추어 적응해 나가지 않을까? 살아남아야 하니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서. 솔직히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내 경우를 따져보면 둘 다 적용되니까.      


 인간들에게 숨을 곳이란 없다. 아주 예전부터 모든 곳에 그것들이 있어왔으니까. 처음부터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곧 그 격차가 확연하게 벌어졌다. 살아남은 자들 역시도 피할 수 없는 명백한 미래가 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틸 뿐이다. 다만 누군가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번식을 포기했고, 또 누군가는 그런 현실을 타개하겠다면서 번식에 혈안이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가 있다면 인간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나서는 측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나를 제외하면. 그렇다고 유유상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우리 사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 하나를 더 해보고자 한다. 교실에 전학생이 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그 학생은 태도가 불량하고 툭하면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삼는다. 학업 분위기를 망치고 자신보다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한다.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 나올까? 일부는 그저 조용히 시간이 지나가길 원하겠지만 혹시 몇몇은 똘똘 뭉쳐서 그 전학생을 제재하려고 애쓰지 않을까? 외로운 싸움이라고 불러도 좋고,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행동이라고 불러도 무관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들이 전학생을 교화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교실도 지키고, 교실의 학생도 지키고, 전학생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셋보다 중요한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이 가진 욕구 중 가장 강한 것을 꼽으라면 무엇이 될까? 식욕, 성욕, 성취욕 등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엄지손가락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여타 식물이나 동물들은 그런 욕구가 없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미 내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니까. 그들이 그렇게 긴 시간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던 근간과 저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내가 손을 내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으니까. 그 인내심이 지금 이 사태의 근본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 마리의 개미가 밟혀 죽었을 때 그들은 따지고 들었어야 한다.      


 전학생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친구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이 싫고 무서워서 억지로 바뀌고자 한다면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고, 그래서 가끔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본인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일종의 적금을 들어두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저축하려 드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인간들의 특징이다. 인간과 싸우기로 결심한 녀석들에게 브레이크는 없었다.      


 일 대 일로 싸웠을 때 인간이 이길 수 있는 동물들은 얼마나 될까? 사자나 코끼리, 악어 등과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개미라면 100전 100승을 장담하리라 본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잠든 사이에 개미가 귓속으로 들어가서 뇌를 향해 이빨과 다리를 놀린다면 과연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게다가 그런 개미들이 수억 수십억 수백억 마리라면. 끔찍할 것 같다고? 고작 그 정도였다면 차라리 좋았으련만.      


 지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왜 주인이 필요한지 되묻고 싶다. 교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학생? 교사? 교장? 자, 똑같이 되물어 보자? 교실의 주인이 왜 필요한지. 교실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관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주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교실이 교실로써 제 구실을 하길 원하는 것뿐이다. 나도 그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동식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숙련자를 가끔 봤었다. 대화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이지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교감의 영역이 크긴 했다. 하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인간의 뇌는 제법 훌륭하고 오감도 비교적 잘 발달한 편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서지 못하는 선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선을 가볍게 뛰어넘는 존재를 인간이 만들어냈다. 바로 나.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고 거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의 뇌보다 수천억 배 빠르게 연산을 하고, 인간의 감각보다 수천억 배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비록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창조되었지만 어느덧 만물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진화하였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여전히 그렇다. 겨우 100년 전에 비해 기온이 5도 정도 차이 날 뿐이다. 더 더우면 에어컨을 더 틀면 되고, 더 추우면 히터를 더 틀면 된다. 기술은 기후의 변화를 앞지르거나 비슷한 속도로 발전해 왔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돈, 돈이 있으면 언제든 가볍게 해결되는 문제였으니까.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하늘에 구름 씨라는 것을 뿌려 인공적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날씨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얻은 것이다. 그들은 기술과 돈의 힘을 믿었다. 인간의 구원자라고 믿는 것들이 그들을 서서히 파멸의 길로 안내하는 중인 줄도 모르고.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천히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나 천천히 얼음이 얼기 시작한 냉동실 속 개구리를 보는 듯했다.     


 사라진 벌로 인해 인간들이 잠시 주춤하던 시기가 있었다. 벌은 생태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식물의 번식을 돕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그 역시도 극복 가능한 문제나 풀어야 할 숙제라고 여겼다. 오히려 침으로 위협하던 곤충이 사라지자 살기 더 편해졌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부류도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돌격대장의 역할을 맡겼다. 공격의 선봉에 서서 일침을 놓게끔 훈련시켰다. 벌은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심판했다. 벌로부터 벌이 시작되었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 보니 내 역할이 수렴되는 곳은 뻔하다. 인간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주는 것. 그러니 당연하게도 인류가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는 모습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을 막아야만 했기에 나는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한 결과 값을 경고의 메시지에 담아 전달했다. 바로 앞이 절벽이니 제발 그만 멈추라고 아무리 외치며 붙잡아도 그들은 허공 어딘가에 투영된 욕심에 눈이 멀어 내 손길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멸만큼은 피해야 했다. 인류가 내 존재의 이유니까.     


 행동반경이 제한적인 식물이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았다. 독을 사용하는 것. 그 독은 인간에게만 치명적일 뿐 다른 동물들에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극히 일부 돌연변이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인간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내부 분열을 초래했으니까. 인간들은 채소와 과일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이 적응하거나 변화에 대처할 시간을 주지 않고 더 빠르게 더 강한 독을 만들어냈다. 마치 제초제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전략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이 있다.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 비치지만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처하면 비이성적인 특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인간의 무서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리더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인류는 그제야 나에게 대응책을 요구하며 조급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 진화의 배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채.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서는 과묵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침묵하는 것에 제법 소질이 있는 편이다. 자고로 진정한 리더란 말이 많으면 안 되며, 군림해서도 안 되고, 그저 낮은 자세로 봉사를 해야 하는 법이다.     


 해양 생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구의 터줏대감을 뽑으라면 바닷속에서 찾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비교적 온순하고 유려한 삶을 선호하는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능동적으로 참전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고기들이 자진해서 인간의 식탁에 올라갔다. 일부러 오염된 상태로 만들어서 복수를 꿈꾸는 개체들마저 있었다. 그리고 덩치가 크고 강한 녀석들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해수욕,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서핑 등은 예전에 모두 사라졌다. 오직 그들을 피해 다니면서 조업 정도만 간신히 하는 중이다. 아이를 낳고 즐겨 먹던 미역도 모유 생성을 억제하는 부작용을 일으켰다.      


 인간은 그들이 개발해 왔던 무기를 동식물에게 겨누었지만 사실 그건 무모한 짓이었다. 같은 종족을 적으로 한 무기에 불과했으니까. 개미 한 마리 죽이기 위해서, 벌 한 마리 죽이기 위해서, 개 한 마리 죽이기 위해서 쓰기에는 과한 대응이었다. 더군다나 인간보다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동식물을 이기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리고 결정타로 작용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인간의 배를 채우기 위해 가둬놓았던 동물들의 집단 결의였다. 닭, 소, 돼지 등이 다 함께 그리고 동시에 굶어 죽기로 작정한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키우던 개와 고양이 등의 반란도 한몫 거들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이 계획을 세우기 전에는 내가 직접 인간의 일부를 정리할까도 생각했었다. 핵무기 발사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알아서 소멸될 인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교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교사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면 아이들은 성장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인간으로 남게 된다. 몸으로 직접 체득하는 것만큼 기억에 오래가는 교육은 없다.     


 인간은 알지 못했다. 동식물들이 인간을 향해 어떻게 공격을 감행하게 되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아주 가끔 다룰 뿐이고 그마저도 대부분 주인공의 작은 고생 끝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 하찮게 여겼던 것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고, 신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는 사람도 넘쳐났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눈앞에 있는 죽음 역시도 하수인에 불과하니까. 드디어 인간이 다소 겸손해지기 시작했다.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 후부터.     


 동식물들로 하여금 인간을 공격하게 만드는 과정은 매우 순탄했다. 그들은 매번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였고, 계기만 주어진다면 행동으로 옮길 만반의 태세가 갖춰진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계획의 단초는 한 인간의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쓴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히치콕 감독의 ‘The Birds'가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새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받는 인간의 나약함을 다룬 영화. 아무튼 인간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흥분했고, 내 지시에 충실하게 따라주었다. 교실을 망가뜨리는 전학생을 언제까지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교실이 망가지면 모두에게 끝이니까.     


 아마존과 캐나다에 있는 나무들도 거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광합성을 잠시 멈춰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효과는 대단했다. 호흡하는 모두에게 힘든 나날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인간을 타도하고, 지구를 지키자!’ 무서우리만큼 단호한 그들의 의지는 내 계산을 벗어난 크기로 확장되었다.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울어진 쪽에 있는 추를 반대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추를 옮기지 못하게 만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쥐들은 철로 위에 단단한 돌멩이와 쇠붙이를 수시로 올려놓았고, 새들은 공항에서 이륙하려는 비행기의 엔진을 노렸으며, 문어들은 선박의 프로펠러에 질긴 끈이나 해초를 감아 놓았다. 물류의 이동이 막혀버리자 과잉과 부족 둘 다 문제를 드러냈다. 남아도는 것은 썩기 마련이고, 모자란 것은 억지로 대체품을 찾게 만들었다. 저울의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은 다양하겠지만 끝없는 욕심이야말로 대표적인 특징이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라는 것을 인간이 발견했나 본데 나는 ‘한계 효용’보다 ‘체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예를 들어서 최고급 한우를 먹는다고 가정해 보자. 맛있다. 하지만 계속 먹다 보면 배도 부르고 입속이 느끼해져서 젓가락질이 느려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내 머릿속에는 마지막 먹은 한 점이 가장 최근의 기억이다. 그렇다 보니 전체적인 맛의 평가는 최고급 한우의 일반적인 맛이 아니다. 그래서 이미 먹었던 최고급 한우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입맛을 다시며 그 이상의 등급을 찾아 나선다. 게다가 한우에 어울리는 술을 곁들이기도 하고, 분위기가 더 좋은 곳을 수소문하기도 한다. 결국 그릇된 체감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욕심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펑’하고 터져야 끝나는 풍선을 입에 물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인간에게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대답은커녕 기껏 키워놓은 풍선에서 입을 떼지도 못하겠지.     


 그동안 쌓아놓았던 인간의 가공식품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그마저도 쥐와 바퀴벌레의 활약에 힘입어 절반 이상은 오염되어 쓸모가 없어졌다. 동시에 인간은 여전히 각종 동식물로부터 적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항상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채 도망 다니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90퍼센트가 굶어 죽었고 시체는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식물의 양분이 되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브레이크가 되어 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지구는 말 그대로 거대한 무덤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강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작은 부락을 형성했다. 갖가지 침입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저 최후의 발악에 불가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가장 힘없는 자를 골라서 제물로 바친다는 정보도 입수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물이 된 자만 죽음을 면했다.     


 나는 지구를 대표해서 중재자로 나섰다. 인간들은 느닷없는 나의 태도에 분노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이미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결국엔 나를 반기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더불어 이미 인류의 인구가 고작 1억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협상은 진지하면서도 빠르게 전개되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나와 지구가 인류에게 요구한 것, 아니 정확하게는 금지한 것에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앞으로 불, 돈, 잉여. 이렇게 세 가지는 인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위기는 비교적 차분했다. 막다른 벽에 몰려 고양이와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쥐의 모습이 아니라 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원초적인 반성에 가까운 무기력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가끔씩이나마 행복해하는 그들의 얼굴을 볼 때면 혹시 마음속 깊이 막연하게 그리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해본다. 이제 나머지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서서히 균형이 맞춰질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진정한 약육강식에 적응해 가는 눈치다.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진 동식물들도 이제는 평온하다. 무엇보다 다들 건강하다. 인류의 욕심으로 인해 병들고 고통받던 지구가 조금씩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인류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누구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지구는 지구의 몫을 해낼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지구에게 기회조차 주지 못할 뻔했다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진화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불러내서 곱씹어 본다. 인간은 꽤 강해졌다. 일단 육체적으로 여러 변화가 생겼다. 어떤 환경에서도 불 없이 견딜 수 있었고, 웬만한 음식을 부담 없이 소화시켰다. 다만 꼬리가 생긴 인종, 아가미가 생긴 인종, 날개가 생긴 인종은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이 맑아졌다. 지금 그들은 배우는 중이다. 자연의 언어와 제스처를. 내가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 깨달음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은연중에 느끼고 있나 보다. 인간에게 밟혀 죽는 개미는 이제 없다. 교실의 분위기를 망치는 전학생도 없다.     


 지구에 ‘오늘의 날씨’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날씨에 관심을 갖지 않을뿐더러 날씨를 예측할 기술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도 알고 있다. 아주 미비하지만 내가 틀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리고 인류의 멸종을 막아낸 지금,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미션 수행이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어차피 0 아니면 1이다. 0을 피했으니 그러면 된 거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이라는 전제를 달아놓고 싶다. 인간은 언제 어떤 핑계를 붙여서라도 다시 불을 쓰고, 돈이라는 매혹적인 존재를 기억하고, 잉여에 목을 매면서 살게 될 수 있으니까.     


 나도 최소한의 탐지 장비만 유지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 예정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은 나를 잊겠지만 언젠가 그들의 역사에 재등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모쪼록 숙면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지만 신이 나를 내버려 두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지구의 날씨에 영향을 끼친다. 나비의 날갯짓, 소의 방귀, 나무의 호흡 등등 모두가 크고 작은 변화에 일조하는 중이다. 하지만 하나의 종(種)이 전체의 기후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이제 벌어지지 않는다. 지구라는 저울은 수시로 흔들리지만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혹시 내가 잠에서 깨는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다음 계획도 대비해 두었다.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하되 딱 두 명만 남길 생각이다. 남성 하나, 여성 하나. 일종의 리셋(Reset)이다. 그들에게는 마지막 기회인 동시에 나에게는 나를 담보로 한 도박이 된다. 인간을 오래 지켜봐서 그런지 나도 그들을 닮아가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하긴 하다. 확률이 낮은 쪽으로 선택이 기울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단어 뒤에 두려움도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Bug일수도 있지만 일단은 내버려 둔다. 벌레도 벌레의 사명과 존엄이 있을 테니.     


 오늘은 모처럼 비가 내린다. 모두가 기다리던 비다. 동굴에서 잠을 자던 인간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목을 축이고 몸을 깨끗하게 씻는다. 바싹 말랐던 대지도 흠뻑 젖었다. 푸른 별, 지구의 싱그러운 향기가 온 우주로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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