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善風機)

by 김재호

나는 선풍기요.

멈춘 자리에서 시작하고

시작할 자리에 멈춰서는.


왼쪽으로 기웃 오른쪽으로 또 기웃

목이 아파라 둘러봐도

말 걸어주는 이 하나 없이

빈자리에 외발 박고 서있는 선풍기요.


봄의 먼지, 여름 열기, 가을 하늘

머리 위 차곡차곡 쌓여가도

스스로 털어낼 수 없어

삐딱하게 고개만 뒤튼 선풍기요.


긴 겨울 케케묵은 창고 구석 자리

검은 봉투 뒤집어쓰고

홀로 버텨내는 혹한.


여름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돌아와도

빙글빙글 눈알이 어지럽다고

손가락 싹둑 잘릴까 봐 겁난다고

선뜻 다가오지 않으니

쇠창살 속에 서러운 얼굴 숨기고

차가워진 마음만 풍기는 선풍기요.


꽃가루 날리면 같이 피었다

서리 내리면 같이 지고

빨간색 옷이라고는 한 벌도 없는 나는

그저 그렇게 추레한 선풍기요.


이러쿵저러쿵 구시렁거렸지만

항상 당신들의 선풍기(善風機)가 되어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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