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술 작작 마시라고 했지? 또 비싼 돈 주고 택시 타게 생겼네.”
속이 너무 쓰려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싶었다. 눈을 뜨자마자 듣는 잔소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여전히 거북하다. 그래도 지친 몸을 이끌고 북엇국을 끓여놔 줬으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잠자코 출근 준비를 마쳤다.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 예정이야? 나는 관광지보다는 휴양지가 좋은데. 기억나지? 일본 갔다가 열사병 걸려서 아무것도 못하고 호텔방에만 처박혀 있다가 살만 쪽 빠져서 돌아왔잖아.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말자고.”
뜨거운 북엇국을 거의 마시듯이 비우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택시를 타더라도 출근 시간에 맞추기는 글렀다.
“에휴. 소꼬리든 쥐꼬리든 꼬리라도 있으면 좋겠네. 무슨 월급이 비눗방울 같냐? 손에 잡힐 듯 둥둥 떠다니다가 펑 터지고 나면 지저분한 흔적만 남고. 노력을 좀 하라니까. 상사들한테 아부도 떨고 입사할 때 마냥 열정, 애사심, 뼈를 묻겠다는 각오 그런 거를 다시 불태워보라고. 나도 멋진 레스토랑에서 유명한 셰프들이 해주는 음식도 먹어보고, 커다란 자동차에서 폼나게 내려보고 싶어. 어째 사람이 그렇게 야망이 없냐?”
회사에 도착하자 이미 작업 중인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간단히 목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 눈빛만으로도 많은 대화가 가능했다.
‘관리자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빨리 작업 시작해.’
‘더 늦다가는 잘릴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등등 모두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는 것이 느껴지자 속이 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야, 감독관이 안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밀린 거 빨리 해치우고 안 늦은 척 해.”
이미 손에 익은 작업이기도 하고 옆자리에 앉은 진수와 민철이가 센스 있게 조금씩 거들어 준 덕분에 수월하게 진도를 맞춰나갔다.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나만 추하다는 사실이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렇다. 나약하고 지저분하고 불필요한 존재는 최대한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옳다.
솔직히 나는 딱히 목표랄 것도 없고 인생은 그저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사는 것이 최고라고 여겼다. 하지만 녀석이 불쑥 나타난 이후로 쉴 틈 없이 시달렸다.
“목적지가 없는 삶은 한낱 깍지 않은 연필일 뿐이야. 언제나 내가 어떤 인생을 써 내려갈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알았어? 날카로운 칼날로 스스로를 뾰족하게 만들고 하얀 세상에 나만의 시나리오를 적어야 해. 그런 게 진정한 인생이라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다그치기도 했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불만에 집중을 해. 지금 상황에 만족하기 시작하면 그걸로 끝이야. 성공한 사람들 봐봐. 가진 게 아무리 많아도, 공부한 게 아무리 많아도, 인기가 아무리 많아도 치열하게 싸우잖아. 그런 전투 본능을 유지하고 한시도 방심하면 안 돼.”
밤에도 낮에도 지치지도 않고 쏟아내는 잔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꾸역꾸역 새겨들었다. 그래서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인간답게 살고 있는 것이리라.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서 커피 믹스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를 타는 분주한 손놀림과 달리 주변은 조용했다.
“말을 못 한다고 해서 패배자가 되라는 법은 없어.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야. 그리고 이곳에 있으면 모두가 똑같잖아. 그러니까 힘을 내라고. 그리고 내가 말한 거 고민해 봤어? 우리의 유튜브 채널.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면 아마 대박이 날 거야. 너는 장애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면서 화를 냈지만, 내 말을 끝까지 잘 들어보라고. 말을 기갈나게 하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이렇게 말을 못 하는 것도 일종의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잘 승화시켜 보자고. 여기서 나가는 순간 너는 특별하다고. 어때?”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놈이 저런 말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혹하기도 했다. 한동안 글도 써보려고 했지만 똑같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과 경쟁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일상적인 대화로 표현해야 하는 부분에서 그들보다 잘 쓸 방법이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책을 많이 본다 한들 직접 듣고 말하는 사람에 비해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분명했다.
“여행 콘텐츠도 좋겠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하는 여행은 다들 지겨워할 거야. 우리만의 색다른 영상을 만든다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좋아하지 않을까? 너는 언제나 그랬듯이 내 말만 잘 따르면 된단 말이야. 내가 그랬지?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와중에 자막까지 달려서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다시 작업을 시작하라는 종이 울리자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말에 집중을 하다가 불량품을 몇 개 만들자 감독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 때릴 듯이 달려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의 거품 문 입모양과 벌겋게 상기된 표정이 생생하다.
“불량품이 불량품을 만들고 있으니 세상 말세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결심했다. 꿈은 꾸는 것이고, 꾸는 것은 빌린다는 뜻이고, 나는 꿈을 빌리기로 했다. 빌렸다가 못 갚으면 그만이고 잘 풀리면 배로 갚으면 된다. 그나저나 녀석이 빌려준 꿈이 온갖 꾼들이 판치는 곳에서 과연 제대로 성장할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 있는 이 녀석이 나태해지고 회의적이 되려는 나를 제대로 된 길로 이끌어줄 것이 뻔하다.
늦은 밤. 방 안의 불을 끄고 누웠다.
‘결과야 어찌 되든 일단 고맙다.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진실한 나.'
‘야. 남사스럽게 우리끼리 그런 인사는 집어치워. 그리고 자꾸 잊어버리나 본데. 내 이름은 바로 '자유의지'라니까. 번듯한 이름이 있는데 이상하게 부르지 마. 알았어? 아무튼 일단 빨리 자. 꿈에서 내가 친구, 아! 기억나지? 무의식이라고 소개해줬었는데. 밤사이에 우리가 이것저것 보여줄 테니까 마음에 드는 거로 콘텐츠 골라봐.’
‘응. 알았어. 부탁해. 이번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