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버려야 지키는 땅, 을파소의 청야전술

by 홍종원

179년, 고국천왕 치세.
고구려의 북쪽 성곽에 불길한 소식이 퍼졌다.
“선비족 기마대가 국경을 넘었다.”


성문은 닫히고, 사람들은 불안하게 웅성거렸다.
젊은 장수들은 창을 움켜쥐며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재상 을파소는 전혀 다른 명령을 내렸다.
“모든 곡식을 거두어들여라.
들판의 창고를 비우고, 마을은 버려라.
적이 와서 먹을 것이 없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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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눈물을 머금고 짐을 꾸려 산성으로 향했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 쌀자루를 멘 노인, 소 한 마리를 이끌고 걷는 사람들.
모두 등 뒤로 연기를 남긴 채 산길을 올랐다.


마당의 곡식은 불타올랐고, 텅 빈 논밭만 바람에 흔들렸다.
그날 밤, 고구려의 들판과 마을, 곡식창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이들의 울음과 어른들의 탄식이 뒤섞였지만, 그 불은 패배의 불이 아니었다.
적의 배를 굶기고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결단의 불이었다.




장수들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적에게 땅을 내주고, 이게 어찌 싸움이라 하겠습니까?”


을파소는 담담히 대답했다.
“싸움은 창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적의 배를 굶겨야 한다.
곡식이 없는 땅에서 군대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을파소의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고구려가 처한 냉혹한 현실이 있었다.


179년, 고국천왕 즉위 무렵.
고구려는 막 영토 확장기에 들어섰다.
그러나 귀족 세력은 지나치게 강했고, 왕권은 약했다.
고국천왕은 이 균형을 깨뜨리기 위해 을파소를 재상으로 기용했다.


을파소는 곧 진대법을 실시했다.
국가가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갚게 하는 제도였다.
굶주리던 백성들은 이 제도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외부 위협은 더 거셌다.
고구려는 한(漢)의 현도군과 요동군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북방의 선비족과 오환족은 끊임없이 국경을 침범했다.
신흥 강국이라 불렸지만, 병력과 물자는 늘 부족했다.


정면 승부로는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을파소는 청야전술을 택했다.
적이 들어올 길목의 농지와 마을을 미리 비우고, 곡식을 불태워 없애는 전략이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적이 국경을 넘어오자 을파소가 청야를 시행하니, 군량을 얻지 못한 적이 물러갔다.”


청야전술은 단순히 농토를 버리는 소극적 회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은 곡식으로 한다는 군수 원리를 꿰뚫은 통찰이었다.


곡식을 버림으로써 땅을 지켰고, 백성을 피신시킴으로써 국력을 보존했다.
눈앞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의 구조를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른 장수들이 전공을 좇아 창을 들었을 때,
을파소는 곡식 창고를 바라보았다.
그곳이야말로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자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통찰은 훗날까지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 임진왜란의 의병들까지도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땅을 비우는 결단, 적을 굶겨 지키는 싸움.
그 냉혹한 전략이야말로 나라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을파소는 말한다.
“승패는 눈앞의 전장에서 갈리지 않는다.
군량을 쥔 자가 결국 전쟁을 이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통찰은 눈앞의 전과가 아니라, 전쟁의 구조를 이해하는 힘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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