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오후 2시.
잔해 위에 세워진 임시정부 청사는 철제 가설물과 임시 천막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난카이 해역에서 발생한 진도 9.1의 거대지진은 일본 열도의 남부를 거침없이 삼켜버렸다. 시코쿠와 간사이 지역은 도로와 철로가 끊겼고, 항만은 침몰하거나 쓸려나갔다. 오사카만 일대는 쓰나미에 휩쓸려 산업지대 전체가 마비되었으며, 고베와 와카야마, 나라현의 수많은 마을들이 지도에서 지워졌다.
도쿄는 행정 기능을 잃었고, 이곳 오사카에서 가까스로 정부가 구조와 명령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료들은 천막 안 임시 회의실에서 모니터와 종이 문서를 번갈아 보며 겨우 국가의 생존선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전부터 하늘을 가른 헬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부서진 고속도로 위로 자위대와 국제 구호단체의 차량들이 느리게 줄지어 움직였다. 거리 곳곳에는 가스 배관과 전신주가 무너져 있었고, 학교 운동장은 임시 피난소로 바뀌어 수천 명의 이재민이 모포 하나에 의지한 채 지내고 있었다. 도시는 아직 숨 쉬고 있었지만, 그 숨결은 고통과 무기력의 사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 대표단이 오사카 임시청사에 도착하자, 건물 밖에서는 몇몇 기자들이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회담장 내부에서는 일본 외무상이 피로한 얼굴로 대표단을 맞았다.
“재난 이후, 외국 대표단과의 첫 공식 외교 회담입니다.”
그의 말에는 안도와 경계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회의 전 일본 내각은 짧은 논의를 가졌다. 한 관료가 말했다.
“우리가 저들에게 종속되는 건 아닌가요?”
또 다른 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단독으로 재건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 정부 내부에는 자존심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 흐르고 있었다.
윤현우 대통령은 회담장에 들어서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임시청사 천장엔 응급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천막 너머의 햇살은 잿빛으로 희미했다. 그 맞은편, 일본 수상 나카무라 아키라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엔 피로가 오래 내려앉아 있었고, 양복 소매에는 구호 현장의 먼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
“대통령 각하, 이렇게 오사카까지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우리가 외교를 재개할 준비가 됐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윤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같은 처지입니다. 백두산 분화 이후 북한 지역의 복구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국경 인근 난민 보호소는 포화 상태이고, 도로망과 물류 시스템도 불안정합니다.”
나카무라 수상은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 고통,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지도자의 첫 대화는 경쟁이 아니라 공감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윤현우는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논의는 단순한 원조나 위로가 아니라, 재난 이후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제안입니다.”
수상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한국이 일본의 재건에 참여하겠다는 뜻입니까?”
윤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답했다.
“네,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돕는 형태의 협력이어야 합니다. 한국도 복구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함께 손을 잡을 때 진짜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일본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습니다. 이제는 서로를 견제하기보다, 공동의 미래를 준비할 동반자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윤현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카무라 수상은 깊은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내각 내부에서도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런 논의 자체가, 우리가 한국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윤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가자는 겁니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먼저 선택할 용기일 겁니다.”
회의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침묵은 결코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기 전의 준비 같았다. 윤현우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서류 하나를 건넸다.
“이 제안이 오늘 회담의 핵심입니다. 함께 검토해 주시죠.”
나카무라 수상은 문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재난으로 모든 걸 잃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문서를 보니,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낍니다.”
윤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응답했다.
“그 가능성은 지금부터 시작될 겁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서류를 넘겼다. 잿더미 위에서, 진심과 이해가 실질적 협력으로 이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제안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한일 재건 공동기금’ 설립이었다.
에너지 인프라 복구, 원전 해체 기술 협력, 산업 회복을 위한 공동 투자로 양국이 협력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동북아 에너지 회랑’에 일본의 정식 참여를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네트워크에 일본이 정식으로 포함되며, 지역의 안정성과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현우는 조용히 한 장의 문서를 앞으로 밀며 말했다.
“다가올 UN 총회에서, 일본이 통일한국의 국가 승인안에 공동 제안국으로 이름을 올려주시길 요청드립니다.”
나카무라 수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바라보았다. 윤현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저희가 단독으로 UN에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공동 제안국으로 함께해 주신다면, 그 의미는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 이 통일은 한국만의 선언이 아니라, 과거의 갈등을 넘어 동아시아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라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바로 그 상징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일본 총리는 협정문에 서명했다. 문서의 제목은 “한일 재건 및 평화협력 공동선언”이었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문을 낭독했다.
“일본은 다가올 UN 총회에서 통일한국의 국가 승인안에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할 것이며, 한국과의 경제·에너지 협력을 동등한 파트너십 위에서 새롭게 설계해 나갈 것입니다.”
그날 오후, 폐허의 흔적이 아직 남은 오사카만 인근의 임시 부두.
간이 게양대 위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바람에 나부꼈다. 전쟁의 기억 위에, 공존의 시대가 조용히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