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 오전 9시. 백악관 웨스트 윙의 회의실.
윤현우 대통령은 전날 밤늦게 워싱턴에 도착했다. 공항 의전은 간결했고, 외신들의 질문도 많지 않았다. 이번 방문은 예정된 정상회담이었지만, 표면 아래에는 전후 질서를 다시 그리기 위한 중대한 협상이 놓여 있었다. 그는 숙소에 머물 틈도 없이 곧장 백악관으로 향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두 정상은 단독 회담에 들어갔다.
윤현우 대통령과 로버트 제임스 미국 대통령.
그들의 첫 마주침은 조용했고, 공기는 단단히 긴장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두 개의 문서만 놓여 있었다. 하나는 미국이 준비한 ‘주한미군 주둔 유지와 작전권 공동운영안’, 다른 하나는 한국이 제안한 ‘전작권 완전 반환과 새로운 안보조약 초안’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윤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은 더 이상 전쟁 중인 국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통일은 외부의 지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책임과 판단에 따라 이뤄져야 합니다.”
제임스 대통령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겁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윤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는 요구가 아니라 제안입니다. 협의 없는 일방적 조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안보 질서의 재편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한국과 미국은 이제 단순한 군사적 동맹을 넘어, 대등한 전략적 파트너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윤현우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을 진정한 동맹, 전략적 신뢰의 파트너로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몇 달 전, 미·중·러 간 비밀리에 맺어진 협정에서 한국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후 질서를 논의하는 자리에, 우리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습니다.”
제임스 대통령의 표정이 굳었다. 윤현우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날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힘이라는 사실을요. 더는 외부에 기대지 않기로 했습니다. 스스로 힘을 갖추겠다는 결심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저희가 있는 것입니다.”
제임스 대통령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윤현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들은... 중립국을 선언하겠다는 뜻입니까?”
윤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중립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동맹이란 관계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어야지, 누구에게 종속된 결과여선 안 됩니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고, 한 장의 문서를 조용히 내밀었다.
“그리고 하나 더, 미리 알려드려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를 확보했습니다. 다만, 이를 공격 수단이 아닌 억지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비확산 원칙은 확고히 지킬 것입니다.”
제임스 대통령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걸 계속 보유하겠다는 겁니까?”
윤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핵무기는 해체하지 않고, 철저히 저희가 관리하겠습니다. 동시에 국제사회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IAEA를 포함한 감시 체제를 수용할 것입니다. 핵은 위협이 아니라, 중립을 지키기 위한 억제력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제임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국은 당신들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의 판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에 더 가까워진다면, 그건 단순한 지역 변화가 아니라 전 세계 전략 균형을 흔드는 일입니다.”
윤현우는 그 말을 받아, 한 치도 물러섬 없이 응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립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립은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완전히 자립한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지금 일본은 난카이 대지진 이후, 내부 복구만으로도 벅찬 상황입니다. 동북아에서 미국과 전략을 논의할 수 있는 실질적 파트너는 이제 한국뿐입니다. 만약 미국이 이번 협상에서 등을 돌린다면,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지금 이 방 안에서 내려질 것입니다.”
제임스 대통령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새로운 질서…?”
윤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군사 동맹은 20세기의 해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과 에너지, 그리고 신뢰의 기반 위에 세워진 다자 파트너십이 해답입니다.”
회의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임스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주한미군 철수는 중국과 러시아의 철수 조치와 보조를 맞추는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협의하겠습니다. 동시에, 미국은 한반도 중립화 구상에 조건부로 동참할 용의가 있습니다. 단 하나, 이 과정에서 한국이 미국을 배제하거나, 독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신뢰, 그것만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윤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함께 걷는 시간으로 증명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이번엔, 저희가 먼저 손을 내밀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낯선 경계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열린 ‘새로운 질서의 문 앞’에서 머뭇대는 숙고의 시간이었다.
제임스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한 주둔지 조정이 아니군요. 당신들은 지금… ‘동맹’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를 바꾸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윤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시를 받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설계하는 동반자로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첫걸음을… 미국과 함께 내딛고 싶습니다.”
워싱턴 현지 시각, 오후 3시. 백악관 브리핑룸의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양국의 국기가 나란히 선 단상 위에, 두 정상이 함께 등장했다.
윤현우 대통령이 먼저 마이크 앞에 섰다. 차분한 목소리로 연단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동맹의 과거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미래의 정의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자 합니다. 오늘, 대한민국과 미국은 새로운 안보 질서에 대한 실질적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이어 로버트 제임스 대통령이 천천히 발표를 이어갔다.
“한미 양국은 군사적 동맹을 넘어,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전환을 시작합니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중국과 러시아의 병력 철수 조치와 보조를 맞추는 방식으로 양국 간 긴밀한 협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조정될 것입니다.”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윤현우 대통령이 발표문에서 읽어 내려간 핵 관련 문장이 기자들의 시선을 일제히 고정시켰다.
“대한민국은 현재 확보된 북측 핵무기 자산을 즉각 해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자산은 외부 위협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간주되며, 한국의 독자적 통제 아래 관리될 예정입니다. 비확산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 국제 감시와 안전 검증을 수용하고, IAEA 및 관련국들과의 협의를 통해 투명한 관리 체계를 구축할 것입니다.”
제임스 대통령은 그 발언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덧붙였다.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국제 협력의 일환으로 한국이 독자성과 투명성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보냅니다. 이제 한국은 ‘중립’이라는 새로운 균형 속에서, 지역 안정의 핵심 억제력으로 작동할 것입니다.”
곧바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것은 사실상 한국의 핵보유 인정인가요?”
“주한미군 완전 철수의 구체적인 일정은 언제인가요?”
“일본 정부는 어떤 입장을 보였습니까?”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두 정상은 이미 방향성에 대한 공동 메시지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것은 숫자나 시간표가 아니라, 질서 재편에 대한 원칙과 철학이었다.
윤현우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한반도의 중립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 중립은 힘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신뢰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힘을 갖추었고, 이제는 신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제임스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이 동맹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트너로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함께 미래를 설계해 나갈 것입니다.”